원각사지 십층석탑(圓覺寺址十層石塔)
원각사지 십층석탑(圓覺寺址十層石塔)
  • 나각순 서울시사편찬위 연구간사
  • 승인 2010.12.24 09:4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나각순의 '서울문화유산 돌아보기' 28]
▲ 원각사지 10층석탑 [나각순]

원각사지 십층석탑은 종로구 종로2가 38번지 탑골공원 내에 위치해 있으며,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2호로 지정되었다.

조선 세조 13년(1467)에 건립된 이 탑은 높이 약 12m에 3층의 기단부, 10층의 탑신부를 갖춘 특수형의 석탑으로 재료는 대리석이다. 원각사지십층석탑은 10층 석탑으로 형태가 특수하고, 의장(意匠)이 풍부하여 조선시대의 석탑 중에서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우수한 작품이다.

이 탑은 종래의 일반적인 석탑과는 달리 사면돌출형의 평면, 삼층으로 된 기단, 목조건물의 형태를 본 뜬 십층의 탑신, 그리고 탑의 전면을 장식하고 있는 여러 조각 등에서 새로운 특색이 발견되고 있다. 이는 고려 충목왕 4년(1348)에 건립된 경천사지 십층석탑(敬天寺址十層石塔)과 유사한 모습을 보이고 있어, 그 영향으로 조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기단부는 모두 3층으로 평면이 ‘亞’자형으로 된 사면 돌출형을 하고 있다. 기단부의 석재 결구 방식은 지대석, 기단 받침석, 면석과 갑석의 순서로 각 부마다 8매의 석재로 구성하였다.

면석의 각 면은 여러 가지 조각으로 화려하게 장식하였는데, 1층에는 용, 사자, 모란, 연화문 등의 무늬를 새겨 넣었고, 2층에는 각종의 인물, 조수, 초목, 궁실 등을, 3층에는 많은 나한과 선인(仙人)들을 새겨 넣었다. 상층기단 갑석 상단에는 난간을 두어 그 위에 탑신부를 받치는 형태로 구성하였다.

▲ 원각사지 10층석탑 기단부에 새겨진 용, 연화문, 인물, 궁실, 나한, 선인상 [나각순]
탑신부는 모두 10층으로 1층부터 3층까지는 기단부의 평면과 같이 ‘亞’자형을 이루고 있다. 각 층마다 난간, 옥신, 옥개가 각각 8매의 별석으로 이루어졌고 표현방식도 동일하다. 1~3층의 탑신은 각 면의 양쪽 모퉁이마다 용(龍) 무늬가 표현된 기둥을 세웠으며, 기둥과 기둥은 다포계 목조건축의 방식을 따르면서 창방과 평방으로 연결하였다.

사방 20면으로 구성된 벽은 한 방향에 다섯 면의 벽이 순차적으로 배치되어 주벽에는 불회도상(佛會圖像)이, 중간 벽에는 인왕상(仁王像)이, 뒷벽에는 불좌상이 놓여 있는데 이는 13회불을 조상한 것으로 보여진다.

한편 옥개석 역시 목조건축의 부재를 빠짐없이 표현하고 있는데, 주벽 위에는 4개의 공포를, 중간벽과 뒷벽 위에는 각각 2개씩의 공포를 구성하면서 이출목 첨차를 하고 있다.

지붕 밑은 서까래와 부연을 표현하였고 그 끝은 막새기와로 마무리하였으며, 지붕 위는 기왓골을 치밀하게 표현한 팔작지붕의 형태이다. 특히 3층은 이중의 지붕으로 되어 있어 그 기교를 더해 주고 있다.

한편 4층부터는 평면이 일반 석탑의 형태와 같은 정방형으로 난간 밑과 처마에는 5개의 공포를 만들었고, 난간돌, 몸돌, 지붕돌 등을 각각 하나의 돌로 조성하였다. 4층의 면석에는 본존과 협시보살을 배치하였으나, 5층 이상부터는 오로지 각 면에 불상만을 배치하였다.

▲ 원각사지 10층석탑_탑신부 불좌상 [나각순]
상륜부는 상당 부분이 결실되어 있다. 10층의 탑신의 위는 십자형 지붕으로 마무리하였는데, 그 위의 상륜부는 지금 남아있지 않다. 이는 상부의 3층 옥개석이 오랫동안 지상에 방치되어 있다가 1947년에 원상태로 복원되었다는 점에서 볼 때, 상륜부의 결실은 오래 전의 일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와 같은 탑의 형태는 약 120년 전에 만들어진 경천사지 십층석탑과 유사하다는 점에서 양 탑의 관계를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입체적으로 도드라지게 표출되었던 벽면의 처리가 원각사지탑에서는 평면화 되어가고, 역동적인 선의 처리도 점차 경직되어 가는 등 전체적으로 형식화되어 가는 경향을 알 수 있어 시대적인 차이에서 생겨나는 표현양식의 변화가 느껴진다고 하겠다.

▲ 1890년대 원각사지 십층석탑과 탑골일대-멀리 북악산이 보인다. [나각순]
이 석탑의 소속 사원이었던 원각사는 고려시대부터 흥복사(興福寺)라는 절의 이름으로 전승되어 오다, 세조 11년(1465)에 회암사(檜巖寺)에서 일어난 사리분신의 서상(瑞祥)을 기념한다는 명분(세조실록 권33 세조10년 5월 갑인조)으로 중건된 국왕의 원찰 성격을 가졌던 사찰이다.

따라서 석탑 역시 2년 후인 세조 13년(1467) 사월초파일에 완공되어 성대한 연등회를 베풀고 낙성하였는데, 탑 속에는 절의 불상에서 분신한 사리와 ‘국역 원각경’을 봉안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연산군 10년(1504)에는 이 절을 연방원(聯芳院)이라는 이름의 기방으로 만듦으로써 승려들이 머무를 수 없게 되었고, 중종 7년(1512)에는 원각사를 헐어서 그 재목을 나누어줌으로써 절이 없어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사찰의 쇠퇴와 더불어 석탑의 관심 또한 사라지게 되었고, 그 결과 상층부의 일부분이 지상에 방치되어 50여 년 전에 복원되었으나 대리석 재질의 풍화작용이라는 문제와 더불어 최근 자동차 매연과 비둘기 배설물 등으로 심각하게 훼손되어 급기야 탑 표면의 부식을 방지하기 위해 해체 수리되어 1999년 유리보호각을 설치하여 보호 중이다.

원각사지 십층석탑은 그 수려하고도 기교적인 면에서 볼 때 조선시대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탑파사상에 있어서도 가히 손꼽히는 수작이라 할 수 있겠다.

▲ 하늘에서 본 탑골공원 일대_일제강점기 [나각순]
한편 광복 직후 원각사지 십층석탑의 상층 3개 층을 들어 올려 복원한 사례가 있다. 이 상층 3개 층이 무너져 내려앉은 원인에 대하여는, 임진왜란 때 왜군이 탑을 일본으로 가져가고자 하여 3층까지 내리고 너무 무거워 그냥 두었다는 설과 연산군이 연방원을 경영하던 시절에 창덕궁에서 보이는 상층부 3개 층이 눈에 띄는 것이 싫어서 내려놓았다는 설 등이 있으나, 어느 것도 정설이 되지 못한다. 이 상층부 3개 층은 1946년 2월 17․18일 양일간에 당시 한국에 진주해 있던 미군 제24사단 소속 공병대에 의해 기중기로 상층에 올려 원상태로 복원되었다. 이 공사 때 장안의 구경꾼들로 인하여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