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 뒤뜰로 전락한 대한제국 신전 ‘환구단’
호텔 뒤뜰로 전락한 대한제국 신전 ‘환구단’
  • 나각순 서울시사편찬위 연구간사
  • 승인 2010.06.14 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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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각순의 ‘서울 문화유산 둘러보기’ 10]

현재 중구 소공동 웨스틴조선호텔이 있는 곳은 대한제국의 존재를 하늘에 알리고, 국제무대에 조선이 황제국으로 새로 태어났음을 선포한 환구단(원구단)이 있던 곳이다. 지금도 그 일부였던 황궁우와 석고가 남아 있고, 황궁우 삼문의 섬돌에 용이 새겨 있어 황제국의 지위를 엿볼 수 있다.

▲ 대한제국의 신전이었던 환구단(원구단)의 석고와 황궁우. ⓒ문화재청 자료

이러한 환구단(원구단)의 축조와 훼손은, 경술국치 100년을 맞는 시점에서 일제의 만행과 더불어 근대화 미명 아래 나라의 국운을 건 역사의 현장이 의미 없이 변질되고 있는 현실을 잘 보여주고 있어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황궁우 삼문의 계단석과 경운궁 중화문∙중화전의 용(龍) 문양이 새겨진 답도를 경복궁 근정전, 창덕궁 인정전, 창경궁 명정전, 경희궁 숭정전의 답도에 새겨진 봉황(鳳凰) 문양과 비교해 그 의미와 가치를 한 번 새겨볼 필요가 있다.

▲ 환구단 황궁우 삼문과 계단석. ⓒ문화재청 자료

고종의 경운궁 환궁과 칭제건원

1895년 을미사변과 아관파천 이후 자주독립에 대한 국민적 자각이 일어나 1986년 7월 2일 창립된 개화파의 사회정치단체인 독립협회와 자주적 수구파들이 연합하여 고종의 환궁을 요구했고, 황제 존칭운동이 일어났다.

당시 열강들은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저지하려는 영국이 일본을 지원하고, 영국을 견제하려는 프랑스는 러시아와 밀착했으며, 미국과 독일은 실리를 쫓는 행보를 하는 등 자국의 이익을 꾀하기 위한 세력 균형을 추구하였다. 이러한 정황에서 1897년 2월 20일 고종의 경운궁(慶運宮) 환궁으로 정국은 정상을 되찾았고, 고종 환궁 뒤 개화파와 수구파들은 같이 칭제건원(稱帝建元)을 추진하였다.

고종과 정부는 칭제를 뒤로 미루고, 우선 연호를 정해 건원하기로 하여 1897년 8월 16일 ‘건양(建陽)’을 ‘광무(光武)’로 고쳐 건양 2년을 광무 원년으로 하여 조서로 반포했으며, 외부에서 새 연호를 각국 공사관에 통하였다. 그리고 칭제운동이 계속 전개되어 9월 21일 황제즉위식을 거행할 원구단의 축조 명령과 함께 공사가 시작되었다.

▲ 1897년 축조 당시 환구단과 황궁우. ⓒ문화재청 자료

이어 9월 27일부터 칭제를 위한 본격 준비 작업에 들어가 의식장소인 원구단을 만들었다. 그리고 10월에 들어와 의정대신 심순택, 특진관 조병세 등이 제위에 오를 것을 요구하는 또 한 차례의 정청(庭請, 세자나 의정이 백관을 거느리고 궁정에서 왕에게 보고하거나 명령을 기다림)이 계속되었다.

이에 고종은 마지못해 따르는 형식을 취하며 1897년 10월 12일에 황제즉위식을 환구단(원구단)에서 진행하였다. 경운궁에서 원구단 정문에 이르는 길가에는 축하 깃발을 들고 환호하는 백성들로 가득 메워졌다.
고종이 원구단에서 하늘과 땅에 황제에 즉위한 것을 알리는 고천지제(告天地祭)를 올리고, 의정대신 이하 백관이 받드는 가운데 즉위단 금의상좌(황금의자)에 오름으로써 의식은 끝났다.

다음날 13일에는 조서를 내려 제위에 오른 것과 국호를 새로 대한(大韓)으로 정하였음을 선포하였고, 14일에는 이 사실들을 각국 공∙영사관에 통보하였다. 이로써 대한제국이 성립되었다.

천자국의 제례를 올리던 신전

이어 원구단에서 동지와 설날에 기곡제(祈穀祭)를 행하게 하였으며, 종례에 남단(南壇)에서 제사를 지내오던 풍운뇌우신(風雲雷雨神)도 모두 원구단으로 옮겨 모셨다.

원구단의 제례도 역대의 옛 제도를 참고하여 천자국의 규모를 갖추었으며, 종묘∙사직보다 우선하는 대사(大祀)의 첫째에 놓이게 되었다. 이는 곧 나라를 상징하는 신전의 성격을 지녔던 것이라 할 수 있다.

광무 3년(1899)에 원구단 북쪽에 팔각 3층목탑 형식의 황궁우(皇穹宇)를 건립하여 황천상제(皇天上帝) 이하 여러 신위의 위판을 봉안하였다. 이어 광무 5년(1891) 12월에는 관민 유지의 발의로 고종의 성덕을 찬양하기 위하여 석고단(石鼓壇)을 세우기로 결의하여, 이듬해 준공하였다.

▲ 환구단 북쪽 팔각 3층목탑 황궁우. ⓒ문화재청 자료

▲ 환구단 석고. 용 문양이 새겨져 있다. ⓒ문화재청 자료
석고는 하늘의 소리를 전하는 것으로 3개의 석고에 용 문양을 새기고 있다. 이 석고의 건립은 중국 주(周)나라 때 선왕(宣王)의 덕을 칭송하는 글을 돌비에 새겨 세웠다는 고사를 본받은 것이라 한다.

그러나 일제강점에 따라 대한제국의 상징인 원구단과 경운궁은 여지없이 훼손되었다. 융희 2년(1908년) 7월 원구단 일대의 땅이 국유로 편입되었으며, 1911년 2월 일제는 원구단과 그 주변을 조선총독부 소관으로 편입하였다. 나아가 1913년 4월에 원구단을 헐고, 그 자리에 건평 580평의 조선총독부 철도호텔을 지으니 이듬해 9월 완공되었다.

한 나라의 가장 신성한 공간에 그들 제국주의 침략자들과 부일세력들이 먹고․마시고․자고․배설하는 호텔을 지으니, 나라가 망한 민족의 아픔을 떠올리는 치욕의 장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것이 지금의 조선호텔이니, 철도호텔 건물은 1968년 헐고 현대식 건물로 다시 지어졌다.

다행이 황궁우와 석고단은 남게 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위상으로 볼 때 ‘팔각당’이라는 의미 없는 이름으로 남은 황궁우가 있는 곳은 조선호텔 커피숍의 후원쯤으로 사람들은 여기고 있고, 그나마 고층 빌딩에 가려져 대한제국의 숭고한 정신과 역사의 계승은 현실의 복잡하고 바쁜 일과 속에 묻혀 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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