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의 법궁, 경복궁(景福宮) ①
조선왕조의 법궁, 경복궁(景福宮) ①
  • 나각순 서울시사편찬위 연구간사
  • 승인 2010.09.17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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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각순의 '서울문화유산 둘러보기' 22 ]
▲ 복원중인 경복궁 전경.   ⓒ나각순

경복궁(景福宮)은 조선왕조의 정궁(正宮, 法宮)으로 600년 도읍의 상징 건물이며, 사적 제117호로 지정되어 종로구 세종로 1번지에 자리하고 있다.

1392년 조선왕조를 개창한 이성계는 1394년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고, 곧이어 궁궐과 종묘 등 주요 국가시설을 조성하였다. 궁궐의 영건은 봉건 전제국가에서는 국가를 상징하는 가장 중요한 사업이었다. 따라서 궁궐 기지의 선정에 적지 않은 심혈을 기울였다.

이에 1394년 8월에 태조는 친히 신하를 거느리고 한양에 와서 도읍지의 적합 여부를 직접 결정했고, 개경으로 돌아가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을 설치하였으며, 심덕부 등으로 하여금 궁궐 조성의 직임을 맡게 하였다. 뒤이어 한양으로 권중화‧정도전 등을 보내어 궁궐 및 종묘와 사직 그리고 시전과 도로 등의 터를 정하게 하였는데, 이들은 9월 9일에 궁궐과 종묘 등의 설계도를 작성하여 개경으로 돌아왔다.

경복궁의 궁궐터는 고려 숙종 때의 남경(南京) 이궁(離宮) 즉 연흥전(延興殿)과 천수전(天授殿)이 있던 곳으로, 바로 이 자리가 너무 좁고 한적하였기 때문에 그 남쪽으로 내려와 해산(亥山) 즉 서북방에 있는 백악(白岳)을 주산으로 삼고 임좌병향(壬坐丙向) 즉 북쪽에 앉아 남향으로 정하였다. 이 터전은 고루 평평하고 넓을 뿐만 아니라 그 앞의 여러 산들이 조회하며 절하는 것과 같았다.

1395년 10월 25일 한양을 도읍으로 정하고 개경을 떠나 28일 한양에 도착한 정부 일행은 한양부(漢陽府) 객사를 이궁으로 삼아 신도읍의 건설에 들어가 11월 3일에는 공작국(工作局)을 설치하였다.

이어 12월 3일 정도전에게 명하여 궁궐의 공사 시작을 황천후토(皇天后土)와 산천 제신에게 제사드려 고하게 하고, 이튿날 권근으로 하여금 궁궐 지을 곳에 나아가 5방지신(五方祗神)에게 제사지내고서 개기제(開基祭)를 거행하게 하였으며, 여러 절들의 승도들을 모집하여 공사장에 나가게 하였다. 이렇게 하여 경복궁 및 한양의 도읍 건설이 시작되었다.

이때 동원된 인력은 주로 전국 여러 산사(山寺)의 중들이었고, 도중에 여러 지방의 정부(丁夫)를 징집하여 부역하게 하였으나 농사철이 되어 이들을 돌려보내고 승도들만이 궁궐공사에 동원되었다.

이어 1395년 8월에는 경기좌도에서 4,500인, 경기우도에서 5,000인, 충청도에서 5,500인의 인력을 동원하여 궁궐 건축공사를 급진전시켜, 9월에 새 궁궐이 준공되었다. 이때 건립된 궁궐은 정전인 근정전(勤政殿)을 비롯하여 연침인 강녕전(康寧殿), 동소침인 연생전(延生殿), 서소침인 경성전(慶成殿), 보평청인 사정전(思政殿), 전문인 근정문(勤政門), 각종 회랑, 동루인 융문루(隆文樓), 서루인 융무루(隆武樓), 누방․주방‧상의원‧승지방‧중추원‧삼군부 등 모두 390여 칸에 이르렀다.

궁궐이 완공된 뒤 1395년 12월 28일에 왕실과 조정 대신들이 한양객사 건물에서 새로 지은 궁궐로 옮겨 새 왕조의 면모와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아울러 태조는 이미 10월 7일에 정도전으로 하여금 새 궁과 각 전당의 이름을 짓도록 명하니, 정도전은 궁의 이름을 《시경(詩經)》 주아(周雅) 편에 있는 ‘이미 술에 취하고 덕에 배부르니 군자 만년 그대의 큰 복을 도우리라. (旣醉以酒 旣飽以德 君子萬年 介爾景福)’는 구절을 인용하여 ‘경복궁’이라 할 것을 아뢰었다.

그러나 경복궁으로 이름 붙인 의미와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정국은 흘러갔다. 태조가 경복궁에 입궁한 지 채 3년도 못되어 왕자들 사이에 피비린내 나는 골육상쟁의 비극이 일어났던 것이다. 즉 제1차 왕자의 난(이방원세력이 세자 방석과 측근의 정도전‧남은 등을 제거한 사건)이 이곳 경복궁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따라서 1399년 왕위에 오른 정종은 3월 7일 상왕 태조를 모시고 옛 서울 개경으로 옮기니 그 후 6년 8개월 동안 경복궁은 주인을 잃고 말았다.

태종 5년(1405) 10월 11일 한성의 이궁으로 새로 수축한 창덕궁(昌德宮)으로 환도한 태종은 이듬해 정월에 충청도와 강원도 장정 3,000명을 동원하여 경복궁을 수리하는 한편 한성부민 600명을 동원하여 개천(開川;청계천)을 뚫고 관청을 보수하는 등 한성을 새롭게 단장하니, 이때부터 한성은 오늘날까지 한국의 수도로 이어지는 구실을 하게 되었다. 즉 경복궁은 법궁‧정궁으로의 지위를 차지하여 임진왜란으로 말미암아 소실될 때까지 생명력을 유지하였던 것이다.

태종이 경복궁에 든 것은 왕 11년(1411) 8월이었으며, 9월에는 명당수를 궁궐 서쪽 모퉁이에 파고 이를 금천(禁川)으로 끌어들이니, 이것이 곧 경회루(慶會樓) 연못이다.

▲ 경복궁 경회루.   ⓒ나각순

이곳에 1412년 4월에 《주역(周易)》의 36궁을 모방하여 간살 36칸에 돌기둥 48주가 버티는 정면 7칸 측면 5칸의 경회루를 지어 외국사신과 조정 관원들의 연회장소로 삼았다. 영의정부사 하륜과 의논하여 ‘경회루’로 이름짓고, 하륜으로 하여금 기문을 짓게 하였으며, 현판은 양녕대군으로 하여금 쓰게 하였다. 그리고 이때 연못을 파낸 흙으로는 침전 뒤편에 아미산(峨嵋山)이라는 동산을 꾸며 궁궐의 면모를 새롭게 하였다. 이 경회루는 현재 국내에서 누각 건물로는 가장 큰 규모에 속한다.

근정문에서 즉위식을 올린 세종은 경복궁에 집현전(集賢殿)을 두고 왕 8년(1426)에 집현전 문신들로 하여금 궁내 각 문과 다리의 이름을 정하게 하였다. 이에 근정전 앞 둘째 문은 홍례(弘禮), 셋째 문은 광화(光化), 근정전 동쪽 행랑의 협문은 일화(日華), 서쪽은 월화(月華)라 하였다. 또 궁성의 동문은 건춘(建春), 서문은 영추(迎秋)라 하고, 근정문 앞 돌다리는 영제교(永濟橋)라 하였다.

이어 세종 11년에 사정전과 경회루를 중수하였고, 13년에는 광화문을 개수하였다. 14년에는 문소전을 새로 짓고, 15년(1433)에는 강녕전의 개수와 신무문(神武門)의 신축이 있었다. 이어 보루각(報漏閣)과 간의대(簡儀臺)를 마련하였으며, 흠경각(欽敬閣)을 짓고 옥루기(玉漏器)를 설치하는 등 세종 때에 전각을 개수 영건하고 궐내에 천문관측시설과 시간을 알리는 제 시설을 완비하였다.

한편 연산군 때는 보루각을 창덕궁으로 옮기고 간의대를 철거하였으며, 경회루 연못에 만세산(萬歲山)을 만들어 그 산 위에 월궁(月宮)을 앉혀 백가지 조화로 장식하고 연못에 용주(龍舟)라는 배를 띄우고 흥청(興淸, 사악하고 더러운 것을 깨끗이 씻으라는 뜻)과 운평(運平, 태평한 운수를 만났다는 뜻) 등 기생 3,000명을 동원하여 희락에 빠지기도 하였다. 그 후 명종 8년(1553) 강녕전에서 불이나 사정전과 흠경각이 불에 탔으며, 이듬해 재건되었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으로 인해 경복궁은 송두리째 잿더미가 되어 무려 273년 동안 폐허로 남게 되었다.

경복궁의 복원문제는 왜란 직후부터 논의되었으나 실행되지 않았으며, 1606년에는 궁궐영건도감을 설치하고 근정전과 광화문 등 주요 건물만이라도 우선 재건하고자 하였으나 대신들의 만류로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다.

이후 고종 2년(1865) 4월 13일 9시경에 소나무 울창한 경복궁 터에 궁궐을 새로 짓는 첫 공사가 시작되면서 연인원 36,000명이 동원되어 3년여의 공사를 단행하였다. 1867년 11월 16일에 낙성된 근정전에 나아가 백관의 조하를 받음으로써 경복궁은 조선왕조의 상징으로 그 면모를 다시 드러냈다.

이는 흥선대원군의 왕권회복이라는 강력한 의지로 이루어진 것으로, 창덕궁 등 여타의 궁궐 규모나 격식보다 훨씬 능가하는 대규모였다. 그 규모는 7,225칸 반이며, 이듬해 후원에 지어진 융문당 이하의 전각도 256칸이었고, 궁성 담장의 길이는 1,765칸이었다. 궁이 완공되고 1868년 7월 2일 국왕과 왕실의 경복궁 이어가 실현되어 정무가 개시되니 실로 중건공사 시작 후 3년 4개월 만이었다.

한편 1873년 12월에 자경전(慈慶殿, 대비전)이 불에 타 재건되었고, 1876년에는 큰불이 일어나 내전 일곽의 전각이 모두 소실되었다. 이에 왕실은 창덕궁으로 옮겨 중건을 기다렸으며, 여기서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겪고 1885년 1월에 왕은 경복궁으로 환어하게 되었다. 그 후 1888년 봄에 영건공사를 착수하여 7월에 이르러 경복궁 내전의 면모를 다시 갖추었다. 그리고 1893년 신무문 밖에 경농재(慶農齋)와 대유헌(大有軒)을 지어 농사일을 중히 여기고 풍년을 기원하였다.

그러나 1895년 궁 안에서 명성왕후가 시해되는 을미사변이 있게 되자, 왕은 이듬해 경복궁으로 이어한 지 27년 만에 러시아의 공관으로 거처를 옮기는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아관파천으로 말미암아 고종은 그후 경운궁(덕수궁)에 머물게 되자 경복궁은 다시 주인 없는 빈 궁궐이 되었다.

이어 1910년 일제의 강점에 의해 국권을 잃은 정통왕조의 법궁은 날로 훼손되기 시작하였다. 일본인들은 궁 안의 전각과 당∙누각 등 4,000여칸의 건물을 헐어 민간에게 방매하였는데, 일례로 건춘문 안에 있던 정현각(正顯閣)이 장충동의 남산장 별장으로 옮겨지고, 그 밖의 많은 건물들이 일본인들의 요리점이나 사찰로 탈바꿈하였고, 남산동‧필동‧용산 등지의 일본인 주택으로 옮겨졌다.

더욱이 1915년 가을에는 일제의 이른바 시정5주년기념사업으로 조선물산공진회를 경복궁에서 개최하여 궁궐로서의 품위를 완전히 상실케 하였으며, 궁궐내 넓은 땅을 이용하기 위하여 건물을 철거하고 진열관을 새로 짓고, 그 정원에는 고대 유물인 각종 석탑‧부도‧불상 등을 지방 각지에서 옮겨와 마음대로 배열하는 문화재 침탈도 거침없이 자행하였다. 그리고 일제는 공진회를 근정전과 교태전 등에서 개회하고 귀빈실로 이용하였으며, 심지어 당시 총독이었던 데라우치(寺內正毅)는 오만 방자하게도 근정전 내 용상에 앉아 경과보고와 개회사를 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1916년부터는 조선총독부 청사의 건축공사가 진행되면서 궁궐 전면에 남아 있던 홍례문과 그 좌우의 회랑, 유화문‧용성문‧협생문 등이 헐리고 영제교도 건춘문 뒤로 자의적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이렇게 조선총독부 청사건물이 지어지고 있던 1917년에 창덕궁 내전에 불이나 대조전(大造殿)을 비롯하여 많은 건물이 소실되었다. 이를 중건한다는 명목으로 경복궁 안의 교태전‧강녕전‧경성전‧연생전‧만경전‧흥복전‧함원전‧연길당‧흠경각 등 여러 전각을 헐어 1918년부터 1920년 사이에 창덕궁으로 옮겨졌다. 나아가 1926년 조선총독부 청사가 낙성되니 경복궁은 그 그늘에 가려졌고, 1927년 9월 15일에는 왕궁의 정문인 광화문을 건춘문 북쪽으로 옮겨 조선왕조의 법궁인 경복궁의 법통을 완전히 끊어 놓았다.

그 이후에도 일제는 1929년에는 신무문 북쪽 즉 오늘날 청와대 경내에 있던 융무당과 융문당 등이 헐려 한강로의 용광사(龍光寺) 건물로 변하였고, 1932년에는 건춘문 서북쪽에 있던 선원전을 헐어 장충동의 박문사(博文寺)를 지었으며, 자선당 자리에 석조건물을 짓고 건청궁 자리에는 미술관을 짓는 등 만행을 계속하였으며, 현재 남아있는 동십자각의 반대쪽에 있는 서십자각을 헐고 1935년부터 궁성을 일반에게 공개하였다.

→조선왕조의 법궁, 경복궁(景福宮)② 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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