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독립문(獨立門) ①
다시 보는 독립문(獨立門) ①
  • 나각순 서울시사편찬위 연구간사
  • 승인 2010.12.03 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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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각순의 ‘서울문화유산 둘러보기’ 27]

▲ 독립문. ⓒ나각순

독립이란 사전적 풀이는 남의 힘을 입지 않고 홀로 서거나 남의 속박이나 지배를 받지 않는 것으로, 한 나라나 단체가 대내∙외적으로 완전한 주권을 행사하는 능력을 갖는 것이다.

우리 역사상 근대적 의미의 독립이란 용어는 19세기 말 서구열강들의 경제적 침탈 등 외세의 등장에 따라 그 위기를 우리의 힘으로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에서 출현하였다. 즉, 1896년 독립협회(獨立協會)를 조직하고 독립문과 독립공원을 건설하여 독립의 의미를 확인한 바 있다.

독립문 건축양식과 의미
독립문은 독립협회의 자주민권(自主民權)∙자강운동(自强運動)의 산물로 우리 민족의 자각을 표현한 문화유산으로, 세워진 지 어언 113주년을 넘겼다.

비록 원래의 자리를 지키지는 못했지만 오늘날 서대문구 현저동 941번지 독립공원 내에 위치한 사적 제32호 독립문은 우리나라 근대사에서 우리 민족의 자주독립 의지를 보여준 기념물이다. 그 앞에 사적 제33호 영은문 주초가 같이 있어 역사의 장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독립문의 건축양식은 서재필의 구상에 따라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凱旋門)을 모형으로 하였으나, 비용관계로 축소한 것이다. 서재필의 자서전에는 독일공사관의 스위스인 기사(技師)가 세부설계도를 작성하고, 그 공역은 한국인 건축기사 심의석(沈宜碩)이 담당하였다고 하였으나, 《경성부사(京城府史)》에는 러시아인 사바친(Sabatine)에 의한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어 확실하지 않다. 

또 석공(石工)은 한국인 고급기술자들이 담당하고, 노역에는 주로 중국인 노무자들을 고용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독립문의 재료는 우리나라에서 산출되는 견고한 백색 화강암으로 만들어졌는데 높이 14.28m, 너비 12.48m이다. 그 구조는 중앙에 홍예문(虹蜺門)이 있고, 좌측 내부에서 옥상으로 통하는 나선형(螺旋形)의 돌층계가 있으며, 문의 윗부분에는 난간이 장식되어 있다.

홍예문의 이맛돌에는 조선왕조의 황실문양인 이화문장(李花紋章)이 새겨져 있다. 남쪽 서울을 향한 쪽으로 한글로 ‘독립문’, 북쪽 중국을 향한 쪽으로는 한자로 ‘獨立門’이라 새겨 넣었으며, 그 좌우에 태극기가 자리하고 있다. 이 역시 한글을 높이는 자주 독립정신의 한 표현이라 하겠다.

한편 독립문 현판글씨를 쓴 인물은 당시에는 독립협회 회원이었지만, 급기야 일제에게 나라를 팔아넘긴 이완용이라는 아이러니도 있다.

독립문은 독립사상을 표현한 기념물로 건립되었다. 따라서 대외적으로 대한제국(大韓帝國)의 자주독립의 결의를 표현하였으며, 한국인의 자각과 독립의지를 세계 만방에 과시할 수 있었다. 또한 독립문 건립은 개화민중(開化民衆)의 성장을 유도하였다.

즉 대한제국 말의 정치∙사회적 어려움으로부터 자아(自我)를 생각게 하고, 나아가 일제 통치로부터 민족의 자주독립을 상기하고 결의하는 상징물로 존재함으로써 민중의 독립정신을 일깨워 주었다. 따라서 그 힘은 독립운동에 참여하는 민족의 저력으로 존재할 수 있었기에, 역사적 유산으로서의 가치를 충분히 발휘하였다고 할 수 있다.

독립문 건립 당시의 정세
독립문이 세워질 당시 국내에서는 갑오경장(甲午更張)으로 내정의 혁신을 꾀하고, 제도의 개혁을 단행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일제의 내정간섭에 의한 상부의 정치개혁에 불과한 불완전한 것이었다.

또 아관파천(俄館播遷)을 계기로 친일내각이 무너지고, 수구파(守舊派)와 개화파(開化派)의 연립정권이 성립되어 일제의 침략세력은 일단 견제되었다. 그러나 러시아를 비롯한 열강들의 이권침탈은 더욱 격화되고 있었다.

아울러 집권층의 외세 의존적 자세와 보수 반동적 경향으로 정국은 더욱 혼미해져 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동학농민운동(東學農民運動)에서 나타난 것과 같이 민중의 자주독립에 대한 열망은 더욱 팽배해져 갔다.

자강 개혁을 전제로 한 내정개혁을 요구하는 등 자주독립을 향한 민중의 의지가 날로 심화되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갔다.

이렇게 19세기 말 청국·일본·러시아 등 외국 열강의 간섭이 나라의 자주독립을 유지할 수 없는 소용돌이 속에서, 우리 민생은 국왕이나 대신들의 외세에 의존하여 국가를 보존하려는 고식적(姑息的)이고 무능한 시책을 비판하고, 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서는 어떤 나라의 어떤 간섭도 허용치 않겠다는 자주독립의 결의를 다짐하였다.

독립문 건립 과정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독립문 건립을 발의한 것은 서재필(徐載弼)이었다. 그는 갑신정변(甲申政變) 실패 뒤 미국에 망명하였다가 1895년에 귀국하여, 독립문을 세울 것을 당시 뜻있는 인사들에게 발의하였던 것이다.

이때 독립문 건립을 추진한 인사들은 조선시대 중국 사신을 영접하던 사대외교(事大外交)의 상징으로 이미 1895년 2월에 김홍집(金弘集) 내각에 의해 철거된 영은문(迎恩門) 옛터, 바로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움으로써 사대적 대외관계의 잔재를 제거하고 자주독립을 주창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애국심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발의는 광범위한 지지를 얻어 1896년 6월에는 독립문 건립계획이 구체화되었고, 6월 20일경에는 이 계획에 대한 국왕의 동의를 얻게 됨과 아울러 문의 이름과 한글로의 표기까지 제안되었다.

이에 따라 구미파의 총본산인 정동구락부(貞洞俱樂部) 세력과 갑오경장의 주동 인물들의 모임인 건양협회(建陽協會) 세력, 그리고 자주 개화정책을 추구하는 실무급 중견관료층을 포함한 독립문 건립 추진자들은, 이러한 민족적 사업을 이루기 위하여 단체 설립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마침내 1896년 7월 2일 독립협회를 창립하였다. 이 독립협회는 독립문을 세우고, 중국사신을 맞이하던 모화관(慕華館)을 개수하여 독립관과 독립공원을 건설할 것을 사업목적으로 명시하였다.

당시 자주독립에 대한 민중의 열망이 팽배하여 있었으므로, 각계각층의 국민들이 독립협회의 사업을 지원하고 독립문 건립을 위한 보조금을 계속 헌납하였다. 따라서 보조금의 헌납은 고관대작뿐만 아니라 당시 신흥사회세력으로 등장한 시민층과 농민층 그리고 임금노동자에서 해방된 천민과 기생에 이르기까지 신분을 초월한 광범위한 민중이 참여하여 거족적으로 이루어졌으며, 태자(후에 순종황제)도 거금 1,000원(圓)을 희사하였다.

그리하여 독립협회가 창립된 2개월 후인 9월 6일에는 서재필이 독립문 건립을 담당하도록 하고, 그 비용은 3,825원으로 책정되었다.

독립문 정초식(定礎式)은 1896년 11월 21일에 6,000여 명의 내외 귀빈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히 이루어졌다. 완공은 1897년 11월에 이루어졌으나,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구체적인 날짜는 알 수 없다.

건립비용은 예상보다 많이 들었다. 독립협회는 애초 책저된 비용 3,825원 외에 경비 1,000여 원이 부족하여, 독립신문을 통하여 여러 차례 보조금 헌납을 호소하여 국민들의 보조금으로 이를 완결하였다.

이렇게 국민 성금에 의해 이루어진 독립문은 우리 민족의 근대사를 장식하는 민족운동의 가장 큰 상징물의 하나라고 생각된다. 먼저 국내외의 불투명한 정치상황 속에서 민족의 자주적 독립을 기치로 내걸고 그 독립을 상징하는 기념물을 건립하고자 하였다는 것은 당시 성숙해 가는 국민의 자주독립정신을 표현한 것이다.

아울러 독립문 건립은 모든 계층의 국민들의 성금으로 이루어짐으로써 사업의 주체가 민중이었음을 알 수 있으며, 나아가 국민들에게 자주 독립사상을 더욱 고취시키는 성과를 거둘 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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