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독립문(獨立門)②
다시 보는 독립문(獨立門)②
  • 나각순 서울시사편찬위 연구간사
  • 승인 2010.12.10 07:1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나각순의 ‘서울문화유산 둘러보기’ 27]

▲ 독립문과 영은문 주초 그리고 독립공원. [나각순]
독립협회의 사상

독립문의 건립으로 상징되는 당시 독립협회의 사상은 외세침탈로부터 자주 국권에 의한 독립국가를 추구하는 근대적 민족주의 사상과 인권의 자유와 평등 및 인민 주권에 의한 국민국가를 추구하는 민주주의 사상, 그리고 열강의 침탈과 봉건적 압제로부터 자강 개혁에 의한 문명국가를 추구한 근대화 사상으로 집약되며 이는 내적으로 통일되어 하나의 유기적인 사상체제를 이루었다.

그 구체적인 사업추진 내용으로 독립신문의 논설에서 강조했듯이 충군애국과 자주독립, 국가발전, 교육과 생활합리화, 민주주의 및 계급타파, 사회적 기여, 문명개화, 경제적 발전, 외세경계, 국제문제, 준법 및 부패시정, 과학기술과 동포애, 언론창달, 정당정치, 남녀평등 사상을 고취하는 한편 애국계몽운동, 국권∙국토∙이권수호운동, 인권보장운동, 개혁내각수립운동, 국민참정운동, 정치변혁운동을 전개하여 근대 민족국가로 나아가고자 하였다.

독립문 세워진 지 113년, 우리의 독립은 이루어졌는가

이러한 독립협회의 사상과 운동의 전개는 우리 민족사가 지향하는 당면과제였으며, 그 후 비록 일제에 의해 국권이 박탈당하는 시련을 겪었지만 그 정신은 면면히 이어졌다.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통하여 공화제 민주정치가 강조되었고, 광복 후 대한민국정부에서도 절대적인 국가의 과제로 근대 자주 민주주주의 체제를 수립하고자 하였다. 물론 새로운 현실인 남북분단에 따른 통일이라는 민족적 과제를 간직한 채 말이다.

반면 한 민족국가로서의 대한민국은 남북이 분단되어 점령군으로 들어온 미군정(美軍政)과 소군정(蘇軍政)이 실시됨으로써 우리의 자주적 의도와 는 달리 완전한 독립을 이루지 못한 채 파행적인 사회 혼란을 가져왔고, 급기야 6∙25전쟁이라는 민족의 비극을 경험하게 되었다.

과연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이념적 냉전체제의 결과물인 6∙25전쟁에 희생된 당시의 우리 역사는 과연 실질적으로 자주 주권국가로서의 독립성을 유지했었다고 할 수 있을까? 특히나 전쟁 중 국제연합의 이름으로 파병한 여러 나라들은 그들의 젊은이들이 이 땅에서 피를 흘리게 됨으로써, 이를 담보로 한 그들의 외교적 경제적 요구는 우리가 물리치기에 어려운 상황을 연출하였다. 어느 민족 어느 나라가 자신들의 국가이익을 생각하지 않고 종교적 사랑만을 베풀 것인가?

한편으로 제3공화국을 이어 제4공화국 말기 유신정권의 몰락과 신군부에 의한 정권장악 과정을 내용으로 하는 드라마가 관련자의 한 사람인 전직 대통령의 비자금 파문과 고리지어 있어 우리를 서글프게 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보여준 기존 정치세력과 신군부의 갈등 및 힘겨루기와 더불어 주목되는 또 하나의 장면은 국가 내 권력구조의 변동과 쿠데타에 준하는 사태의 발발 때마다, 먼저 정보를 장악하고 사태추이를 정확히 판단하는 외국대사관과 외국군사령부의 대처 상황이고, 또한 국내 관련 유력자들이 대사 또는 군사령관을 만나 답변하고 인정받는 장면이다.

물론 남북분단의 현상 속에서 군사적 협조체제상 필수 불가결하다 하더라도 자주 독립국가로서의 지위를 가지고 볼 때 그 수위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리고 내부적으로는 민족적 갈등의 치유가 필요하고, 사회경제적 양극화 현상에 따른 계급모순의 극복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는 현실을 직시하여야 할 것이다. 민족공동체의 형성과 민생의 생활질서가 신뢰를 바탕으로 이루어질 때 우리의 외부모순도 극복해 나갈 수 있는 저력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독립문 건립의 의지와 정신 계승할 때 힘 받을 것

우리 현대사가 경제적인 측면과 산업화 면에서 아무리 성공한 역사로 평가되고 긍정적으로 본다하여도, 아직 내부적으로 많은 사람이 수긍하기에는 해결하여야 할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즉 우리 현대사의 연속된 파행 속에서 이루어진 갈등 고리를 해결하여야 한다.

정치적으로는 제1공화국이 성립되어 독재화의 길을 걸었고, 미완의 4∙19혁명을 통하여 제2공화국이 출범하였다. 5∙16군사정변으로 제3공화국이 등장하였으며, 10월유신과 제4공화국의 장기집권 획책이 있었다. 나아가 10∙26사태와 광주민주화운동의 모순 속에서 제5공화국 군사정부가 출발되었다.

이어 6월항쟁의 민주화 열기 속에서 제6공화국이 성립되었고, 3당의 합당이 있었고 민간정부가 들어섰다. 그리고 문민정부․참여정부에 이어 다시 보수정권이 수립되었다.

국민들은 이전 군사정권의 부정축재와 비자금파문으로 불신과 분노를 금하지 못하였다. 우리는 1960년대 이후 경제개발계획에 따라 수많은 근로자들의 값싼 노동력을 바탕으로 절대빈곤을 탈피하고 경제적 독립을 위하여 밤낮없이 일을 해왔다.

그 몫이 지금 정당하게 분배되었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정경유착에 의해 경제적 독점과 생산시설의 해외유출은 이제 젊은 층의 취업난을 야기하고 있으며, 장년층의 조기 은퇴를 만들어내고 있다.

더욱이 6자회담을 통한 한반도의 평화를 기대하기에는 아직도 거리가 멀다. 서해안의 전운과 동북공정을 전면에 내세운 중국의 성장과 북한의 결맹관계는 우리의 일상을 불안하게 한다.

특히 근래의 천안함사건과 연평도 민간인 포격사건에서 보여주는 중국의 오만함과 북한의 막가파 행동 등은 우리로 하여금 독립국가로서의 위상을 다시 생각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올림픽과 아시아경기대회에서 많은 메달을 따고 좋은 성적을 올린다고, 오늘의 현실 국제외교상황을 명실공히 자주 독립 민주주의 국가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지금 우리는 냉전체제의 붕괴와 탈이데올로기를 통한 세계적 경제전쟁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나 한반도 현실은 아직도 경계해야 할 문제가 남아있다.

113년 전 독립문을 세우고 자주 민권에 의한 근대 민족 민주주의 국가를 추구했던, 계층을 초월한 자주독립정신을 다시 한 번 생각해야 할 것이다. 국론의 분열과 국력쇠약으로 식민지로 전락되었던 역사적 경험을 다시 답습할 수는 없는 것이다.

진정한 독립은 경제적 독립과 정치외교적 자주 주권이 행해져야 하는 것이다. 이는 국내 여러 계층의 집단들이 불신과 부정부패의 고리를 끊고, 인간 평등에 의한 민족∙문화∙생활공동체의식으로 상호 조화를 이루는 사회를 먼저 만들어 나가야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풍요로운 생산과 평등한 분배를 바탕으로 통일문제와 자주적 외교에 국력을 모아야 할 것이다. 이는 독립문 건립의 의지와 정신을 계승할 때 힘을 받을 것으로 생각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