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자연환경의 영향을 받고 산다. 사람은 자연으로부터 식ㆍ의ㆍ주 재료를 얻어 생활을 시작하였고, 생활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문명을 낳았다. 그런데 문명은 사람과 자연이 서로 잘 받고 잘 주고 하는 원만한 관계가 유지될 때 이루어졌다는 명제 아래서 설명될 수 있다.
21세기 들어 자연의 훼손에 따른 재앙이 사람의 생존과 생활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다. 따라서 이미 훼손된 자연의 보복으로부터 최소한의 삶의 질을 높이고 유지하기 위해 자연보호와 환경생태운동이 일어났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환경생태운동은 우리 주변의 산ㆍ하천 등이 자연으로서만이 아니고, 그 땅에 살았던 사람의 삶의 무대였고, 나아가 역사의 무대가 되어 하나의 생활공동체를 형성하는데 정신적 지주였음을 인식할 때 그 효과를 더욱 높일 수 있다. 따라서 우리 조상들은 정치사상의 토대에 자연을 숭배하면서 인간의 왜소함을 겸허하게 받아들였던 것이다.
개성에서 조선왕조를 연 태조 이성계는 도읍지를 서울로 옮긴 일 년 뒤인 1395년 12월에 북산(백악ㆍ북악산)의 산신인 백악산신(白岳山神)을 진국백(鎭國伯)에 봉하는 한편, 남산의 산신을 목멱대왕(木覓大王)에 봉하여 국가에서 봄ㆍ가을로 제사를 올리도록 하였다. 이는 삼국시대 이래 우리 조상들의 오악(五嶽)사상으로 표현되는 하늘과 가장 가까이 있어 존경되는 산악숭배사상의 표현이기도 하였다.
백작의 작위를 부여하여 하나의 인격체롤 인정하고, 개인의 사사로운 제사가 아닌 국가에서 제사지내는 대상으로 서울의 주산(主山)인 백악의 지위가 부여된 것이다. 아울러 백악의 주산으로서 역사성과 가치는 서울의 유구한 역사와 정통성을 부여하는 중심에 있다. 바로 서울문화 생성의 원천이 풍수지리상으로 북현무 주산인 백악으로 상징되었다고 할 수 있다.
영정 찢고 불귀의 객이 된 권필
백악신사는 오늘날 해발 342m의 북악산에 위치하여 신위는 서쪽을 향하여 동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전설에 의하면 백악신위는 정녀부인(貞女夫人)이라는 여신이었는데, 옛날부터 영검하다 해서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서 많은 복을 빌었다는 것이다. 정녀부인과 광해군 때의 시인 권필(權鞸)과 관련된 일화가 전한다.
즉 호방하고 기개 넘쳤던 권필은 어렸을 때 정녀부인의 영정 앞에 뭇사람들이 절하는 것을 보고 괴이한 기운이 세상을 어지럽힌다며 영정을 찢어버렸다. 그런데 영정을 찢던 그날 밤 권필의 꿈속에 꽃다운 정녀부인이 나타나 “나는 하느님의 딸인데, 너와 같은 어린 아이에게 모욕을 당하였으니 머지않아 원수를 갚을 터이니 그리 알아라.”하고 사라졌다고 한다.
그 후 권필은 과거시험에서 광해군 외척들의 세도정치를 비난한 세태를 풍자시로 지었다. 이로 인해 권필은 시화(詩禍)를 입어 형을 받고 귀양 가던 중 장독(杖毒)으로 불귀의 객이 되고 만다. 당대와 후대인들은 이를 정녀부인의 앙갚음이라 믿게 되었고, 그 후로 더욱 정녀부인 영정에 치성을 드렸다고 한다. 백악신사는 조선 초부터 있었으며 고종 연간에는 폐치된 상태였다.
백악신사의 주인공인 정녀부인 설화는 백악이 서울사람 정서의 중심에 있었음을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백악은 하늘로 이어지는 서울이 주산이요, 문화형성의 모태라는 상징성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그 자연경관의 보존으로 민심 안정과 문화 창조의 지속성이 유지될 수 있다는 믿음이 오늘날에도 실천적으로 계승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