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 서울타워 옆 목멱신사(木覓神祠)
남산 서울타워 옆 목멱신사(木覓神祠)
  • 나각순 서울시사편찬위 연구간사
  • 승인 2010.04.16 19:09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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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각순의 ‘서울 문화유산 둘러보기’ 2]

 남산, 즉 목멱산에는 국사신을 모신 사당으로 목멱신사가 있어 북악산 백악신사와 더불어 남과 북에서 서울을 지켜주고 있다. 따라서 산 자체로 본다면 북악산이 주산으로 아버지 산이 되는 것이고, 남산은 안산으로 어머니 산이 되어 그 사이의 많은 생명력을 보호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도성 안에서 보는 산의 모습도 뾰쪽한 삼각형 모습의 북악산과 누에 모습의 남산이 남성과 여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대비된다. 그렇지만 백악신사에 모신 산신은 정녀부인이라는 여신이요, 목멱신사에 모신 산신은 국사(國士, 國師) 또는 목멱대왕(木覓大王)으로 남성 신인 것이다.

▲ 남산 서울타워.

▲ 1958년 남산 전경.

이렇게 한양 도성의 기본구성은 음양의 조화 속에서 형성된 것이니, 한양 도성은 우주만물의 기본질서가 평화롭게 순환되는 태극의 형상인 것이다. 따라서 그 땅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그 질서를 조화롭게 운용하여 아름다운 사람이 사는 아름다운 자연생태를 유지해야 할 과업이 있다.

목멱산은 조선시대 한양을 도읍으로 정하면서 궁궐 남쪽에 있는 안산(案山)이 되니 자리 잡은 방향에 따라 자연스럽게 남산으로 불리었다. 또 인경산(引慶山)이라고도 하였으니, “밝고 양지 바른 목멱산, 곧 남산이 길이길이 경사스러운 일들을 끌어 들이옵소서”라는 축원을 비는 뜻이 담겨 있다. 국가의 안녕과 민생의 평온을 기원하고, 그 원력으로 무궁한 발전을 꾀하려는 바람이 간직된 것이라고 하겠다.

조선 태조 4년, 남산 산신에 목멱대왕 봉작

남산을 목멱산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산 위에 목멱신사가 있었던 데서 연유한 것이다. 조선 태조 4년(1395년) 12월에 북산인 백악산신을 진국백(鎭國伯), 남산의 산신을 목멱대왕으로 봉작하여 국가에서 제사를 받들게 하니 목멱대왕을 봉사하는 사당을 목멱신사라고 하였다. 이렇게 빽빽이 나무가 들어선 남산에 신전이 마련되니 산 이름은 목멱산, 신전 이름은 목멱신사였던 것이다.

▲ 국사당 표석
<세종실록> 지리지에 “목멱신사가 도성의 남산 꼭대기에 있고 소사(小祀)로 제사지낸다”고 하였다. 이렇듯 남산 꼭대기에 자리한 목멱신사를 나라에서 제사 지내는 사당이라 하여 일명 ‘국사당’이라고도 하였다. 그리고 봄․가을로 하늘에 제사(醮祭)를 올렸다. 이 목멱신사(국사당) 건물은 남산 정상 팔각정 자리에 한강 쪽 서남간을 향해 지금의 서울타워(N서울타워)가 있는 언저리 성벽 안에 자리했는데, 그 곳에서 동쪽으로 50m쯤 아래 숲 안에 성제우물도 있었다고 한다.

태종 때에는 삼신(천신·산신·수신)과 태조, 그리고 무학대사 등을 모시고 국사당이라 명명했다고 한다. 또 다른 설에 의하면 태조 잠저 때 함경도 영흥에서 장차 왕이 될 것이라는 한 노파 모녀의 예언이 적중하자 왕위에 오른 뒤 그 모녀의 초상을 달고 봄․가을로 제사를 올리면서 국사당이라 불렀다고 한다.

제사는 고종 연간에 폐지되었는데, 건물은 계속 남산에 남아 있었다. 그러나 일제가 1925년에 남산에 조선신궁(朝鮮神宮)을 세우면서 이전을 협박하여, 그해 7월에 국사당은 한양 도성의 우백호 인왕산 서쪽 기슭 선바위 아래(종로구 무악동 산 3번지)에 옮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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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 2010-04-16 22:42:18
국사당 표석 사진이 작아서 글씨가 안보여요. 크게 해주세요 남산사진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