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0년 도읍과 조선왕조의 흥망성쇠
600년 도읍과 조선왕조의 흥망성쇠
  • 나각순 서울시사편찬위 연구간사
  • 승인 2010.07.06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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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각순의 ‘서울 문화유산 둘러보기’ 13] 한강유역③

한강유역의 역사지리적 의미는 한강을 허리띠로 하고 삼각산을 진산으로 삼아 조선왕조의 도읍지를 형성했다는 데서 더욱 크게 부각된다. 1394년 조선왕조 정부가 한양으로 천도함으로써, 비록 관할구역의 변화가 있었지만 오늘날까지 600여 년간 수도로서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한양천도의 배경으로 풍수지리설의 영향과 신왕조 창건과정에서 고려를 따르는 구 귀족세력의 저항을 탈피하려는 의도를 들고 있으나, 무엇보다 한강을 끼고 있는 인문지리적 위치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다. 즉 한강을 끼고 있는 한양이 지리적으로 한반도의 중심에 위치하여 지세가 훌륭하며, 생업의 터전으로 적당하고, 수륙교통이 편리하며, 군사적 요충으로서 좋은 조건을 간직하고 있다는 점이 도읍지로서의 부각됐던 것이다.

전근대사회에서 국가재정의 운용을 위한 수입은 거의 농업 생산물에 의존했다. 그리고 농업경제가 사회 하부토대를 이루고 있는 상태에서 국가 통치를 위해서는 농산물을 현물조세로 수취하여, 중앙권력기관 곧 왕궁과 관아가 있는 곳으로 운반해야 했다.

따라서 세곡의 운송은 국가적으로 중대사의 하나였으며, 육상교통이 발달하지 않았던 까닭에 바닷길과 내수로를 이용한 조운(漕運)에 의해 대량의 조세가 수송됐다. 그러므로 도읍지는 나라의 중앙에 위치하고 수륙교통이 편리한 곳이 주목됐으며, 한강을 끼고 있는 한양이 바로 이러한 곳에 해당됐다.

▲ 살곶이다리(사적 제160호). 조선시대 한양과 동남지방을 연결하는 주요통로로 전곶교(箭串橋)라 한다. 조선 전기 64개의 돌기둥으로 만든 석조교량.


한양천도와 조선왕조 600년

조선시대 북악 아래 자리 잡은 경복궁을 비롯한 창덕궁∙창경궁∙경희궁∙경운궁의 5대 궁궐이나 종묘∙사직단∙도성∙관아∙원구단∙성균관 등 국가를 상징하는 모든 시설물들은 바로 한강을 토대로 이루어진 상부구조물이라 할 수 있다.

한성, 곧 한양도성은 풍수지리적으로 삼각산(북한산)을 진산(鎭山, 또는 祖山)으로 하고, 북악을 주산(主山)으로 하며, 낙산(낙타산, 타락산)을 좌청룡, 인왕산을 우백호, 목멱산(남산)을 안산으로 개천(청계천)을 내명당수로 하였으며, 한강을 외명당수로 하여 그 남쪽에 조산(朝山)인 관악산을 두었다.

이러한 지리적 조건을 이용하여 한강의 상류로부터는 경상도∙강원도∙충청도와 경기도의 조운이 모여 용산강 강안에 있는 강창(江倉)에 미곡∙포목∙목재 등이 집결됐고, 하류로부터는 황해도∙충청도∙전라도의 조운이 모여 마포강 연안 강창에 수합되어 관료의 녹봉∙군사비∙관공서 운영비 등을 비롯한 한성 주민의 생활필수품으로 쓰였다.

반면에 수운교통에 절대적 존재였던 한강은 육상교통에 있어서는 큰 걸림돌이 되었다. 따라서 진(津)∙도(渡)가 설치되어 나룻배가 이용됐고, 연사군∙정조 등 국왕이 도강할 때는 주교(舟橋, 배를 엮어서 만든 다리)를 설치했다. 아울러 군사기지로 진(鎭)을 설치해 통행인의 동태도 살폈다.

이러한 강변시설은 조선 후기에 들어 전국에서 올라오는 물화의 집산지가 되었다. 아울러 한강변에는 경강상인(京江商人)이라 하는 상인집단이 형성되어 운수업과 상업활동을 활발하게 벌였으며, 그들은 자본의 축적을 통하여 18∙19세기 자본주의 맹아를 잉태시킨 시대 변혁의 주인공으로 성장했다.

경강상인은 주로 용산∙마포∙서강∙동작∙두모포∙송파 등지를 중심무대로 활동했다. 이들은 국가의 보호를 받으며 금난전권(禁亂廛權)을 행사하던 운종가 일대의 육의전을 비롯한 시전 어용상인들과 대항했으며, 1791년 신해통공(辛亥通共) 이후 시전상인을 능가하여 서울의 상권에 커다란 영향력을 끼쳤다.

외적의 침입과 한강 방어진

한편, 한강은 수도한양을 보호하는 자연적 요새 기능을 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때 관군이 남한강의 충주 탄금대에서 패배하자 선조와 조정대신은 한양을 포기하고 의주까지 파천했다. 이때 수도방어책으로 용산구 한남동에 있던 제천정(濟川亭)을 지휘소로 삼아 한강을 방어토록 했다.

당시는 싸워보지도 못하고 후퇴했지만, 전열을 수습한 조선군은 한강변을 공략하여 왜군의 보급로와 퇴로를 끊고 궁지에 몰아넣었다. 권율(權慄)의 행주대첩은 그 대표적인 경우다. 또 양평의 구미포, 여주의 마탄 등지에서 북상하는 왜군을 격퇴했다.

평양으로부터 패퇴하고 행주에서 참패한 왜군은 서울에 머무르면서 조선은 외면한 채 명군(明軍)과 강화회담을 추진했다. 한강변 원효로4가와 청파동 일대에 주둔한 왜군은 명군과 용산강에서 선상회담(船上會談)을 진행시켰다. 이때 조선에서는 용산창(龍山倉)과 도성 안의 식량저장소를 불태우는 등 자력 탈환을 도모했다.

그러나 전쟁 종결을 서두르던 명의 술책에 따라 화의가 성립되고 왜군의 한성 철수가 이루어졌다. 땅은 유구하고 세월은 흐르는 것으로 이때의 명과 왜의 강화회담 터인 심원정지(心遠亭址)는 조선말의 영의정 조두순의 별장이 되었고, 천연기념물인 백송이 남아있는 문화유적지로 오늘날 산 교육장이 되고 있다.

그리고 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국왕이 남한산성으로 피난을 하면서 한강의 천연요새의 이점을 살리지 못하고, 결국 한강변 삼전도에서 치욕의 강화조약을 맺기에 이르렀다.

▲ 한국 천주교의 성지 잠두봉 유적과 양화나루터. 양화나루는 조선시대 교통의 요지였으며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기능을 담당한 곳이다. ⓒ문화재청 자료

제국주의의 침입로가 되다

조선 말기에 이르러 한강은 서구열강의 제국주의 세력과 대응하며 국제질서에 편입되는 역사의 현장이 되었다. 고종 초 천주교 박해를 구실로 프랑스함대가 양화진(楊花津)까지 올라왔고, 급기야 병인양요를 일으켰다. 1871년에는 통상을 요구하는 미국에 의해 신미양요가 일어났고, 1876년에는 운양호 사건을 계기로 일제의 개항 요구와 더불어 한강을 통해 제국주의 세력이 한양에 침투하기 시작했다.

1890년경부터 용산 일대는 일본 제국주의 세력이, 마포 당인리 일대는 중국세력이 진출하면서 개시장(開市場)을 통한 경제침투가 시작됐다. 이 지역에는 개시장의 설치에 따라 사람의 통행을 위해 1988년 한강에 증기선이 취항했으며, 1900년대에는 전차와 철도가 놓이고, 한강 철교가 설치됐다.

▲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수도시설 뚝도수원지.

이렇게 한강변에 몰려든 외세와 이들에 의해 강요된 강변의 교역∙교통∙산업 등의 변화는 결국 조선을 식민지로 전락시켰다. 이는 비록 외세에 의한 것이지만 한강을 장악한 집단이 이 땅을 지배한다는 역설적인 결론을 인정하게 하는 것으로, 한강은 민족사의 영광과 고난의 흐름을 함께 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일제에 의해 한강 이남 영등포지역이 공업화로 병참기지화 되더니, 점차 노량진 일대는 서울권에 편입되어 한강을 중심으로 한 강남지역이 새로운 도심권으로 등장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제국주의 침략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한강의 기적과 한강르네상스

해방 후 1949년과 1963년의 서울시역 확대로 서울특별시는 명실공히 한강을 중심으로 한 강남∙강북 시대를 맞이했다. 더욱이 1970년대부터 한강 개발이 추진되어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서울의 시세(市勢)를 한강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균형 있게 배치시켜 놓기에 이르렀다.

1988년에는 한강변 잠실지역에서 인류의 최대 축제인 올림픽이 개최됐고, 새로운 천년이 시작되어 2002년에는 월드컵 축구경기를 열게 되어 세계인의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로 부각됐다. 한민족의 웅비하는 모습을 한강의 기적으로 표현하는 것처럼 한강의 역사∙지리적인 가치는 한민족의 흥망성쇠와 함께 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 1986년 세워진 한강종합개발 준공기념탑.

나아가 2007년부터 현재까지 한강르네상스 사업이 전개되어 한강 중심의 서울 도시공간 구조 재편을 추진하고 있으며, 한강변 역사유적 연계 강화 및 서해와 연결되는 주운 기반을 조성하여 세계로 뻗어가는 서울의 위상을 높이고 있다.

이렇게 한강은 민족문화의 통합성을 바탕으로 한민족 문화가 세계로의 지향을 추진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는 한강을 어우르면서 삼국통일로 민족문화와 정치의 통합이 이루어졌고, 그 전통은 계속 이어져 고려왕조 또한 일찍이 한강유역을 장악함으로써 통일국가의 기반을 마련했다.

이후 남경 경영은 조선왕조의 도읍지로서 한성으로 계승되어 오늘날의 대한민국 수도 경영의 무대로 이어졌다. 나아가 한강은 한민족 문화 중심에 위치하여 세계문화 창조의 중심무대로 기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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