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늘로 치솟는 서울의 으리으리한 빌딩을 같은 눈높이에서 조망할 수 있는 곳은 어디일까. 많은 사람들이 여의도 63빌딩 등 이른바 ‘랜드 마크’ 빌딩 등을 떠올린다. 이들 빌딩의 고층은 한 끼에 10만 원이 넘는 음식을 파는 고급 식당가로 채워져 있다. 하지만 실제로 서울을 가장 잘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은 따로 있다.
남산 비탈의 약수동이나 한남동 영세 주택가, 이제는 재개발에 들어간 지 오래인 관악구 난곡마을 등이다. 이런 동네의 옥탑방은 겨울이면 방안 물그릇까지 얼어붙을 정도로 춥고 여름엔 찜통이 따로 없지만 조망 하나는 남부럽지 않다.
종로구 창신동의 비탈길에 다닥다닥 붙은 집들도 대부분 조망이 좋다. 동대문시장을 상징하는 두산타워가 손에 잡힐 듯 내려다보인다. 이런 동네가 대부분 그렇듯 시내를 내려다보기 위해서는 가파른 언덕길을 걸어 올라야 한다. 그런 수고가 따르기 때문에 부자들은 비탈길 동네를 찾지 않는다.
창신동은 여기다 밤 새워 돌아가는 미싱 소리가 그치지 않는다. 골목 양쪽으로 곳곳에 자리 잡은 작은 봉제공장에서 나는 소리다. 창신동 미싱 소리는 70년대 제 몸을 불살랐던 전태일 열사의 기억을 담고 있다. 그로부터 4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미싱 소리는 그치지 않는다.
○조선총독부 지은 돌 캤던 채석장 마을

이 곳에는 일제 강점기 채석장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돌산에서 캐낸 돌은 ‘중앙청’으로 알려진, YS정권 당시 철거해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 창고에 있는 조선총독부를 짓는데 사용했다.
인공적으로 깎아내린 절벽 위 아래로 아슬아슬하게 집을 짓고 사는 주민들이 돌산밑의 주인공이다. 여러 집들은 울퉁불퉁한 지형에 맞춰 서울 어디에서도 보기 어려운 형식의 모양새로 지었다. 이 동네 사람 외에는 굳이 오르지 않는 언덕인 까닭에 일부러라도 구경삼아 들러볼만 하다.

창신시장 안쪽에는 ‘매운족발’ 집들과 겨울이면 더 진한 냄새를 풍기는 순대국집들이 있다. 시장을 지나 계속 올라가면 ‘육거리’가 나온다. 바로 이 육거리에서 3시 방향으로 뻗은 길을 따라 ‘돌산밑’까지 닿을 수 있다.
다른 길은 동대문역 1번 출구 뒷쪽 창신사진관을 마주하고 오른쪽으로 들어서는 창신길을 따라 가면 된다. 창신길 길가에는 3층 높이의 건물들에 가게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한참을 오르다보면 2,3층 높이의 건물들 위로 거대한 돌 절벽이 병풍처럼 둘러싸인 풍경이 나타난다. 바로 창신동 595번지 돌산밑이다.
여기까지 오르는 길이 문제다. 창신동 골목은 다른 산동네와 마찬가지로 집이 들어설 때마다 방향을 바꿔 꼭대기까지 구불구불한 미로를 이룬다. 여기다 다른 동네에서는 찾기 어려운 분주함이 하루 종일 이어진다. 골목을 오르내리는 주인공은 커다란 짐칸을 단 오토바이들이다.

○전태일 열사의 뜨거운 사랑 간직한 창신동

1970년 창신동에서 분신한 전태일 열사가 마지막 남긴 말이다.
지난 8월 ‘포스트 박근혜’라며 대세론을 만들던 당시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가 창신동 전태일재단을 찾았다가 거절 당했다.
박 당시 후보는 이후 전태일 다리로 이름붙인 청계5가 버들다리의 전태일 열사 흉상에 헌화하는 것으로 그날 일정을 마무리했다.
이를 두고 민주 진영에서는 노동자들과의 만남에 앞서 전태일 자리를 찾은 것은 그가 내세운 ‘국민통합’이란 구호의 허구성을 드러낸 것이라고 비난했다.

전태일은 이같은 노동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끊임없이 자본세력에 도전했다. 하지만 서울시 근로감독관은 그의 청원을 번번히 무시했고 마침내 청와대에 ‘대통령에게 보내는 서한’까지 보냈으나 묵살 당하고 만다.
그의 ‘대통령에게 보내는 서한’에는 “나이 어린 소녀들이 안질, 신경통, 위장병, 폐결핵 등에 고생하고 있으며, 성장기에 한 번 고생하면 평생 고칠 수 없게 된다”고 하소연하며 근로환경을 개선해달라는 호소가 담겨 있다.
결국 이러한 호소를 알리기 위해 스스로의 몸에 불을 붙였던 전태일은 창신동의 투사이자, 공업입국을 내세워 국민을 혹사한 박정희 정권에 당당히 맞선 청년으로 남았다. 이후 노동계를 중심으로 전태일재단이 만들어지고 그의 어머니 고 이소선 여사가 재단을 이끌었으나 지난해 타계하고 만다.

창신동은 서울시와 우리나라 현대사의 질곡을 상징하는 곳이기도 하다.
○마로니에 공원과 학림다방의 문화

이곳 혜화역 인근은 대학로, 또는 동숭동 마로니에 공원 등으로 알려졌다. 대학로는 1985년 정부가 붙인 이름이다. 이곳에 있다가 1975년 이전한 서울대 캠퍼스의 흔적을 지우지 않기 위해서다. 당초 이곳은 일제 강점기 전국 최고의 엘리트가 입학했던 경성제국대학이 들어서면서 대학 문화가 이식됐다. 광복 후 경성제대는 서울대로 이름을 바꾸고 동숭동 전체가 대학촌이 됐다.
서울대의 관악캠퍼스 이전 후에는 서울 곳곳에 흩어져 있던 문화단체와 극장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인사동에 이어 서울의 두 번째 대표적인 문화의 거리가 된 것은 2004년부터다.
대학로는 먼저 수많은 연극 소극장을 떠올리게 한다. 크고 작은 극단과 극장, 그리고 수입이 거의 없는데도 연극에 대한 열정 하나만으로 이 거리를 떠나지 못하는 배우들이 대학로의 주인공이다.
이밖에 아르코미술관, 1000석 규모의 대극장 동숭아트센터 등이 들어서면서 서울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문화 중심지로 자리잡았다.
대학로는 전두환 정권이 7년 동안 집권한 1980년대부터 학생운동의 본거지 역할을 하기도 했다. 서울 곳곳에서 모여든 학생들은 대학로에서 연합행사와 집회를 벌였다.
대학로가 있는 동숭동 한복판에 있는 학림다방은 50여 년 동안 변함없이 낡은 소파와 테이블, 그리고 커피로 서울의 지식인들이 자주 찾는 곳이다. 학림다방을 거쳐 간 수많은 문사와 예술가, 언론인들의 발자취만 모아도 대한민국 문화사 한 권을 엮어낼 수 있을 정도다.
또 도산 안창호 선생이 창립한 흥사단 본부도 있고 마로니에 공원 건너편에는 서울대 의대와 서울대병원이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매운 음식과 순한 음식만큼 차이 나는 동네

혜화로터리 인근에 있는 혜화칼국수와 혜화손칼국수가 주인공이다. 이들 식당은 모두 쇠고기 사태와 양지, 사골로 국물을 우려낸 칼국수를 낸다. 밑국물을 만드는 고기를 저며 내는 수육도 곁 음식으로 인기가 높다. 모두 담백하고 밍밍한 맛이다. 다른 지방에 비해 ‘육고기’를 많이 쓰는 서울식 칼국수다.
정통 평양냉면이나 함흥냉면과는 전혀 다른, 그만큼 가격도 싼 매운 냉면이 유명해진 창신동과 혜화동은 음식의 차이만큼 동네 분위기도 확연히 다르다. 우리나라의 옛 지리서인 ‘산경표(山經表)’에는 산줄기가 물줄기를 나누는 기점인 분수령(分水嶺)이 되고 이는 곳 인심과 풍속까지 달리 만든다고 했다.
창신동과 혜화동 또한 그리 높지 않은 언덕을 사이에 두고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보인다.
○재개발 대신 마을 재생사업 택한 이화동

이화동 벽화마을은 이미 서울시민은 물론, 지방의 나들이객까지 찾아오는 데이트 명소가 된지 오래다. 이화동은 낙산에 있는 한양도성과 이승만 전 대통령이 머물던 이화장 등 문화재 보호를 위해 난개발의 삽질을 피할 수 있었다. 대신 갈수록 마을이 낙후해 간다는 주민들의 불만도 적지 않았다.

이에 따라 2003년부터 추진된 재개발 사업을 둘러싼 주민간 갈등도 빚어지고 있다.
일부 주민은 다른 지역과 같은 개발이 급선무라는 입장인 반면, 일부는 재개발을 적극 반대하고 있다.
여기다 최근 서울시가 재개발 출구전략을 가시화하면서 ‘보존’으로 방향이 잡히고 있는 추세다. 최근 재개발 조합원 136가구 중 약 60가구가 재개발 반대 청원서 서명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신 서울시가 지원하는 마을공동체 조성 등을 통한 마을 재생사업에 초점을 맞추겠다는 움직임이다.
남은 문제는 조합이 설립된 후 그 동안 재개발을 위해 투입된 총 20억원대의 매몰비용을 과연 누가 어떻게 분담하느냐다.
이런 고민은 정부의 매몰비용 지원을 요구하고 있는 서울시의 고민과 맞닿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