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다섯 살,
하면 금세 떠오르는 삼중당 문고
150원 했던 삼중당 문고
수업시간에 선생님 몰래, 두터운 교과서 사이에 끼워 읽었던 삼중당 문고
특히 수학시간마다 꺼내 읽은 아슬한 삼중당 문고
위장병에 걸려 1년간 휴학할 때 암포젤 엠을 먹으며 읽은 삼중당 문고
개미가 사과껍질에 들러붙듯 천천히 핥아먹은 삼중당 문고 <후략>
장정일의 시 ‘삼중당 문고’ 중 일부다. 삼중당은 1931년 종로구 견지동에서 문을 연 출판사다. 하지만 장정일의 ‘삼중당 문고’를 읽으면 잉크 냄새와 종이 냄새 자욱한 충무로 인쇄골목이 떠오른다.
1970년대 읽어도 읽어도 다 못읽을 것 같아 조갈증을 부르던 삼중당 문고는 당시의 아나로그 감성을 자극한다. 충무로에 남아있는 크고 작은 인쇄소와 출력소, 지업사도 아나로그 문화의 상징으로 읽혀졌다.
○아나로그 출판의 향수 자욱한 거리
충무로 인쇄골목도 지난 20~30년 동안 많은 게 변했다. 1990년대 초, 매킨토시 편집이 막 들어와 자리 잡을 당시의 충무로와 지금의 충무로는 변해도 너무 변했다.20여년 전, 당시로서는 첨단인 매킨토시 편집을 마치면 커다란 외장하드에 담아 충무로의 출력소롤 종종걸음 쳤다.
화면 편집의 화려함이 필름으로 출력됐을 때 얼마나 조잡해지는지, 더구나 실제 인쇄를 마쳤을 때 애교스럽게 그었던 실선은 어디로 날아갔는지….때로 충무로 출력소와 인쇄소 문턱에는 초보 편집 디자이너의 눈물로 얼룩지기도 했다. 가난한 출판사나 광고기획사무실의 제작담당자들의 애환과 한숨이 서려있는 골목이 바로 충무로다.
○디지털 세상에서 생존의 길 찾는 인쇄인들
충무로의 변화는 온세상이 디지털로 옷을 갈아입으면서 ‘숙명’처럼 다가왔다. 가장 큰 타격을 입은 업체는 슬라이드 대여업체들이다.출판인쇄용 슬라이드 이미지 컷 한 매에 적게는 5만 원에서 많게는 20만 원까지 받고 빌려주던 슬라이드 대여업체 대부분은 문을 닫았고 그라피카 등 대형 업체는 디지털 이미지 판매·대여와 출력, 사진 관련 소품 판매에 주력하고 있다.
가장 용도에 맞는 슬라이드 필름 한 매를 빌리기 위해 몇 시간 동안 파일을 털어 보고, ‘루페’를 이용해 고른 사진을 꼼꼼히 살펴보는 풍경은 이제 찾을 수 없다.
이른바 전국의 내로라하는 ‘사진장이’들이 다 모이던 슬라이드 필름 전문 현상소 ‘포토피아’도 필름 현상과 인화의 비중이 크게 줄었다고 한다. 대신 고해상도 디지털 이미지 출력과 데이터 관리 등으로 주력업무가 바뀌고 있다.
‘○○프로세스’ 등의 간판을 내건 인쇄용 필름 출력소도 급격하게 쇠락했다. 출력소들은 저마다 고해상도 드럼 스캐너를 도입, 슬라이드 필름 등의 이미지를 받아 편집 화면에 앉혔고 인쇄 필름을 출력한 뒤 다시 ‘하리꼬미’와 ‘고바리’ 작업을 거쳐 인쇄판을 출력했다. 인쇄판도 과거 아연 성분이 많은 금속재질에서 PS판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디지털 카메라로 찍은 사진 이미지를 그대로 편집한 뒤 PC 조판 화면 그대로 인쇄판을 출력하게 되면서 수많은 제판 기사들이 일자리를 잃었다.
이러한 변화는 충무로 인쇄골목 풍경도 바꿔놓았다. 과거 커다란 돔키 카메라 가방을 어깨에 맨 포토그래퍼나 월간지 사진기자들이 드나들던 포토피아부터 한산해졌다.
포토피아는 한 때 많은 매체를 가진 일간지의 출판사업부에서만 한 달에 300통 이상의 36컷 슬라이드필름을 현상하기도 했다.
이들 슬라이드 사진 수요가 디지털 카매라로 옮겨가면서 필름을 맡긴 뒤 현상이 될 때까지 2시간 남짓을 인근 만화가게 등에서 보내던 포토그래퍼나 편집 디자이너도 사라졌고 만화가게도 문을 닫았다.
인쇄를 둘러싼 아나로그적인 풍경도 대부분 사라져 데이터는 웹하드 등으로 전송을 마치고 과거의 필름교정은 화상교정으로 대치돼 충무로의 유동인구마저 줄게 됐다.
하지만 충무로는 아직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고품질 인쇄 메카로서 명성을 지키고 있다. 4컬러 인쇄기보다 더 큰 6컬러 인쇄기가 보편화된 지금도 높은 해상도와 정밀도가 필요한 고급 브로셔나 카탈로그 등의 인쇄물은 충무로의 2컬러 인쇄기로 뽑아내는 품질이 가장 뛰어난 편이다.
기계보다 앞선 수십년 경력의 인쇄장이들이 뽑아내는 인쇄 품질이 그만큼 높다는 얘기다.
○일제강점기 서울의 본정통(本町通)
충무로는 서울중앙우체국에서 극동빌딩을 지나 인현시장, 충무초등학교까지 이어지는 충무로5가 8번지까지의 길이 1.75㎞, 너비 10∼20m인 가로를 말한다.도심지 남쪽을 동서로 관통하며 퇴계로와 명동로 사이에 길이 나 있다. 일제 강점기에는 이 길을 본정통(本町通)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광복 이듬해인 1946년 10월 1일 충무공 이순신(李舜臣)의 시호를 본따 이름을 바꿨다.
일제 강점기에는 명동을 중심으로 일본인 상인들이 몰려와 살면서 혼마치[本町]라는 일본인촌을 만들기도 했다.
일본인촌은 중국대사관이 있던 지금의 중앙우체국 뒤 충무로 2가에서 세종호텔 뒷길에 이르는 낮은 언덕에 일본 공사관이 들어선 1880년대 이후부터였다. 이 일대는 비가 오면 땅이 잘 마르지 않아 진고개라고도 불렀다.
옛 지명인 진고개는 옛 스카라극장(현재 아시아경제 빌딩) 옆 진고개식당이란 이름으로 남아있다. 중앙우체국 뒤에 있었던 중국대사관 자리는 흥선 대원군 시절 포도대장인 이경하(李景夏)의 집이었다고 한다.
1889년부터 10여년 동안 청나라의 주답조선총리교섭통상사의로 온 위안스카이[袁世凱]가 이곳에 거주하면서 조선의 내정에 간섭했고 이후 중국대사관과 화교보통소학교가 세워져 중국인촌이 만들어졌다.
○저항의 기억 아로새긴 명동성당
명동성당은 1970~80년대 독재에 저항했던 시민학생들의 피난처였다. 김수환 당시 추기경이 경찰 진입을 몸으로 막았고 시민학생은 며칠 밤을 명동성당에서 지내며 지친 마음과 몸을 달랬다.긴 항쟁의 시간이 끝난 뒤인 지금도 명동성당은 철거민 등 사회적 약자들이 기대고 싶어 하는 성과 속의 경계지대를 이루고 있다.
매년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명동성당은 가장 먼저 전국 매스컴에 모습을 드러낸다. 한국의 크리스마스는 명동성당에서 시작되고 성당 앞에서 이어지는 긴 명동길 따라 뻬곡히 몰려나온 시민들에게 이어진다. 명동은 일제강점기 당시 지금의 충무로인 본정(本町)보다 낙후된 지역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주택가였으나 일제강점기 충무로가 상업지역으로 발전하면서 인접지역인 명동까지 급부상하게 됐다. 특히 6·25 전쟁이 끝난 뒤 명동은 지식인과문인 등 예술인들의 본거지가 되면서 서울의 문화중심지가 되기도 했다.
지금은 명동성당과 전국은행연합회, UNESCO회관 등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이 상가지역으로 유행문화의 거리로 자리 잡았다.
또 강남 개발 이후 압구정동 일대에 유흥가가 만들어지면서 명동은 내국인보다 외국인 관광객 유통인구가 더 많은 국제도시가 되고 있다.
○손님 수 맞춰 양 정하는 식당
을지로3가 뒷길의 막다른 골목에 ‘우화식당’이라는 작은 음식점이 있다. 실내 테이블은 2~3개 남짓, 여름이면 가게 앞에 간이 테이블을 놓지만 겨울에는 좁은 실내에서 서로 어깨를 비며 음식을 먹어야 한다.이 식당의 주력 메뉴는 쇠고기전과 코다리찜, 보리밥 등이다.
쇠고기전은 한 접시에 단돈 1만원. 그런데 한 접시의 양이 주문한 손님 일행의 수에 따라 달라진다. 2명 일행이 한 접시를 시키면 딱 두 사람이 먹을만한 양이고 4명이 시키면 그만큼 양이 불어난다.
주머니 가벼운 손님 입장에서 이보다 친절한 서비스가 없다.좁은 실내에서 술을 마시다보며 자연스럽게 옆자리 손님들과 말을 섞게 된다. 안주도 서로 나누게 되고 술잔까지 한 두 차례 오가면 급기야 모두 테이블을 붙이고 합석하게 된다.
서울 한 복판에서 막걸리 한 잔, 소주 한 잔으로 만드는 술자리 공동체가 완성된다. 우화식당에서 멀지 않은 ‘만선호프’는 겨울만 빼고 봄부터 가을까지 밤마다 커다란 맥주 축제가 벌어진다.
퇴근한 직장인들이 하나 둘 모여 수백 명의 군중을 이루고 이들은 저마다 노천 테이블에서 노가리 안주로 생맥주를 마신다. 처음 가본 사람들은 이곳이 정말 서울 한복판이냐며 깜짝 놀라기 마련이다.
충무로와 을지로, 명동은 서울의 소문난 식당들이 밀집한 곳이다.
육향이 가장 진한 국물과 깔끔한 고명이 돋보이는 우래옥 냉면은 한그릇에 1만2000원, 을지면옥과 필동면옥은 각각 9000원씩이다.
월남한 이북출신 노인들 가운데 가장 부유한 이들은 우래옥으로, 그 다음은 필동면옥이나 을지면옥으로, 그 다음은 탑골공원 뒤에 있는 유래식당(5000원)으로 간다는 말도 있다.
을지로1가에서 명동으로 들어서는 길에는 1939년 청계천 변에 문을 열었던 곰탕집 하동관이 있다. 김두환도 자주 찾았다는 하동관은 2007년 도시재개발에 밀려 명동으로 자리를 옮긴 뒤에도 옛 맛을 고스란히 재현한다.
밀려드는 손님들이 긴 줄을 서있다 차례로 1층 테이블과 2층 방을 가득 채운다. 그 많은 손님들이 벗어놓은 신발을 정확하게 찾아주는 종업원의 눈썰미까지 대단한 서울의 대표적인 노포(老鋪)다.
○영화인의 거리에서 출판, 언론사 거리로
충무로는 1960∼1970년대 이후 문화·예술·영화인의 거리로 유명해지면서 아직도 한국영화의 메카로 꼽힌다.과거 많은 국내 영화사들이 충무로에 밀집해 있었고 스크린에서만 보던 영화배우를 보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충무로의 중간 지점인 충무로역에서 을지로 3가까지 남북으로 이어진 길에만 대한극장과 스카라극장, 명보극장 등 개봉관이 몰려있어 영화산업의 중심지 구실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90년대 중반 이후 영화 상영관이 멀티플렉스관으로 빠르게 바뀌면서 스카라극장이 문을 닫았고 명보극장도 명보아트홀로 바뀌면서 영화 팬들로부터 멀어졌다. 지금은 멀티플렉스관으로 리모델링한 필동 쪽의 대한극장만 남아 옛 충무로의 영광을 반추하고 있다.
지하철 3호선 충무로역 지하 1층 통로에는 아직 대종상 시상식 모습을 담은 사진들이 전시되고 있으나 이를 눈여겨 보는 시민들은 없다.
충무로는 영화뿐만 아니라 출판산업의 중심지 역할도 해왔다. 직원 2~3명이 꾸려가는 영세출판사가 생겼다 사라지고 그 빈 자리에 또다른 출판사가 만들어진다.
충무로에서 20년 이상 출판사를 경영해온 윤승천(54) 씨는 “우리나라 출판산업은 다른 어떤 산업직군보다도 영세하고 비합리적인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며 “그런 만큼 창업이 쉽기 때문에 수많은 출판사가 명멸을 거듭하고 있다”고 전했다.
많은 젊은 출판인들이 이른바 ‘대박’을 꿈꾸며 출판사를 차리지만 가장 먼저 총판 중심의 유통체제에 가로막혀 좌절하게 된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아직 충무로에는 수백가지 아이템을 가진 수백명의 젊은 출판인들의 도전이 계속되고 있다. 이들 영세 출판인들이 오가는 거리 한쪽에는 매일경제와 서울경제, 또 신생 경제전문지인 아시아경제 본사가 자리잡고 있다.
매일경제는 충무로역 바로 앞에 있던 옛 사옥에서 남산쪽 신사옥으로 본사를 옮겼다. 경복궁 앞 한국일보사에 있었던 서울경제는 법인 분할 후 충무로3가 43번지 충무로타워 9~11층에 새 터전을 꾸리고 있다. 아시아경제는 옛 스카라극장 자리에 새로 지은 빌딩을 근거지로 하고 온오프라인 매체사업을 진행 중이다.
○MRO 직격탄 맞은 고도성장기의 주역들
을지로는 종로, 청계천과 나란히 서울 중심가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길이다. 서울 4대문 안쪽의 지도는 이들 3개 가로축을 중심으로 읽을 때 가장 빨리 읽을 수 있다.
을지로입구역이 있는 을지로1가에서 중부시장, 방산시장을 품고 있는 을지로4가까지는 옛스러운 풍경을 다른 지역보다 더 많이 남겨두고 있다. 을지로는 3가에서 4가에서 청계천까지 이어지는 공구상가와 조명기상가로 유명하다.
을지로공구상가의 수많은 연장과 공구를 이용하면 탱크는 물론, 전함 한척도 문제없이 만들 수 있다는 얘기도 있다.
이들 공구상가는 1970~80년대 우리나라의 고도성장기와 함께 번성해 왔다. 하지만 이들 을지로 공구상들은 지난 2011년 대기업들이 속속 소모성자재구매대행(MRO) 자회사를 설립하면서 위기를 맞게 됐다.
과거 을지로 공구상들의 최대 고객이었던 대기업들이 자회사를 통해 소모성자재를 조달, 구매가를 낮추고 계열사까지 늘리겠다고 나선 것이다.
이에 대한 사회적 비난이 거세지자 삼성그룹이 가장 먼저 MRO사업 철수를 밝혔으나 을지로공구상가는 아직 당시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서울시는 공구상가와 조명기상가가 밀집한 진양상가를 세운상가 도시재개발 프로젝트와 하나로 묶어 리뉴얼 한다는 계획이지만 아직 별다른 진척을 하지 못하고 있다.
막상 재개발한다고 해도 이 일대 상인들에 대한 보상 문제부터 해결하기 어렵다. 조명상가와 인테리어 상가 등도 대형 건설사 등의 B2B 구매 등이 늘면서 과거와 같은 호황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여파가 거듭되면서 을지로 공구상가 등은 날이 갈수록 활기를 잃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