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함께 돌자 서울 한바퀴 ⑮ 서울역
다함께 돌자 서울 한바퀴 ⑮ 서울역
  • 이인우 기자
  • 승인 2013.01.25 16: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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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뜨고 코 베이던’ 서울역… 615년 역사 불태운 숭례문과 남대문시장에서 만리재까지
▲ [포털 다음 지도 갈무리]

서울역은 ‘눈뜨고 코 베어가는’ 서울의 관문이었다.
시골에서 3등 열차를 타고 무작정 상경한 10대 청소년부터 두루마기 차려 입은 어른까지 서울역에 내리면서 거대하고 낯선 땅 서울에 들어서게 됐다. 서울역니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랜드마크’였던 시절이었다.

서울역은 일제가 철도를 놓은 뒤인 1900년 문을 열었다. 올해로 113년의 역사를 가진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근대유적이다.

지금 ‘문화역서울284’로 역할을 바꾼 서울역 역사(驛舍)가 만들어진 것은 1925년. 벌써 88년이나 지난 일이다. 옛 서울역 역사(사적 제284호)는 일제 강점기 건물 가운데 가장 뛰어난 외관을 갖춘 것으로 평가된다.

서울역 앞은 서울도성의 대표적인 관문인 숭례문이 있고 그 뒤는 서울의 2대 재래시장인 남대문시장이다. 또 서울역의 서쪽은 가파른 고갯길을 넘어 마포로 가는 만리동고개가 있다.

만리동은 서울의 여러 산동네 가운데 옛 모습을 고집스럽게 지키고 있는 마을이다. 현대화의 물결은 만리동 고개를 넘어다닐 뿐, 고갯길 안쪽 동네까지 미치지 못하고 있다.

○오르세 미술관 본 딴 ‘문화역서울284’

▲ 지난 2011년 8월 서울 중구 복합문화공간 '문화역서울 284'(구 서울역사) 개관식에 앞서 무용가 이정화씨가 교방살풀이춤을 추고 있다.
지난 1980년대까지 서울역 앞에는 수많은 노점이 여행객들에게 술과 순대, 국수 등을 팔았다. 멀리 지방으로 떠나는 사람들은 열차시간을 기다리며 이 노점에서 소주 한 잔씩 마시곤 했다.

특히 귀성객이 몰리는 추석이나 당시 설 명절을 대신하던 신정(양력 1월 1일) 무렵 서울역 광장은 큰 장터를 방불케 했다.

일제 강점기부터 시작된 신정을 폐지하고 설 명절을 쇠기 시작한 1989년 이후에는 서울역 광장도 말끔히 정비돼 떠들썩한 노점이 점차 줄어들기 시작했다.

▲ 2일 서울역광장에서 대한적십자사 임직원, 봉사자들이 시무식을 대신해 노숙인과 독거노인들에게 떡국을 끓여 나눠주는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당시 노점이 즐비했던 옛 서울역 광장은 바로 옆 새 역사(驛舍) 앞과 비교해 인적이 뚝 끊어졌다. 옛 서울역사는 2011년 8월 ‘문화역사울284’로 단장됐다.

‘문화역사울284’는 서울 중구의 복합문화공간으로 새롭게 꾸며져 대규모 아틀리에가 됐다. 이는 1986년 프랑스 파리시 7구 세느강변의 낡은 기차역을 미술관으로 탈바꿈시킨 ‘오르세 미술관(Orsay Museum)’을 본 딴 것이다.

‘오르세 미술관’은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를 위해 만든 역사를 허물지 않고 미술관으로 리모델링 한 것이다. 당초 파리시는 이곳에 거대한 호텔을 지을 계획이었지만 미테랑 당시 대통령의 그랑프로제(미테랑 대통령이 추진한 대규모 문화건축물 프로젝트, 재임기간 14년 동안 9개 프로젝트에 8조 원 투입)에 따라 미술관으로 조성됐다.

▲ 19일 오후 서울역 광장에서 열린 '용산참사 4주기 추모대회'에서 시민들이 희생자들 분향단상에 추모하고 있다.
서울역 옛 역사는 과거 플랫폼까지 개조하지 못해 ‘오르세 미술관’보다 작은 규모에 그쳤지만 허물거나 이전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천만 다행이다.

○덜컹덜컹 비둘기호는 추억 속으로

▲ 서울역에서 지방으로 떠나는 시민들이 KTX 열차에 오르고 있다.
서울역 옛 역사의 문을 완전히 닫은 때는 2004년 4월 KTX 열차 개통부터였다. 서울역은 그 이전인 1989년 (주)한화유통이 우리나라 최초의 민자역사를 준공, 운영하다 2000년 5월부터 서울종합민자역사 사업이 추진되면서 현재의 역사를 갖추게 됐다.

2004년 이전까지 서울역에서는 경부선 외에도 호남선·전라선·장항선 등 모든 장거리 노선과 경의선까지 운행했다. 지금은 경부선 KTX와 새마을호, 무궁화호, 아산역까지 운행하는 누리로호, 경의선 통근열차만 남아있다.

나머지 호남선과 장항선, 전라선 등은 용산역에서, 경원선과 경춘선, 태백선 등은 당초 그대로 청량리역에서 출발한다.

열차도 많이 바뀌었다, 1990년대까지 달리던 비둘기호가 운행을 중단한데 이어 2004년 통일호까지 운행하지 않으면서 열차 창문을 열고 바깥 바람을 쐬는 일조차 불가능해졌다.

여름 휴가철, 달리는 열차의 통로에 나가 출입문 난간에 매달리는 일은 이제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개찰구나 도착후 역사를 빠져나오는 출구에서 일일이 검표하고 차표를 반환하는 일도 사라졌다.

많은 승객이 인터넷과 스마트폰으로 예매한 승차권으로 열차를 타고 더 이상 검표하는 역무원들도 보기 어렵게 됐다. 대신 열차 승무원들이 승차권 정보를 전송받은 단말기를 들고 운행 중 각 열차의 좌선을 확인하는 것으로 검표 업무를 대신한다.

▲ 2013년 설날 기차표 예매가 시작된 15일 오전 서울역 창구에 기차표 예매를 위해 시민들이 줄지어 기다리고 있다. 설 승차권 예매는 15일에 경부, 충북, 경북, 대구, 경전, 동해남부선 대상 승차권을, 16일에는 호남, 전라, 장항, 중앙, 태백, 영동, 경춘선 대상으로 이뤄졌다.
또 과거 열차를 오가며 음료수와 과자, 삶은 계란, 김밥 등을 파는 홍익회 직원도 안전을 이유로 사라진지 오래다.

대신 새마을호와 무궁화호 승객들은 각 열차마다 편성된 식당칸에 직접 가서 필요한 음료나 간편식을 구입해야 한다. 이마저도 KTX 열차에서는 편성하지 않아 열차여행의 낭만은 찾기 어려워졌다.

서울역에 거의 유일하게 남아있는 옛 풍경은 설이나 추석을 앞두고 벌어지는 귀성차표 예매를 위한 북새통이다. 철도공사는 매년 설, 추석 연휴를 앞두고 온라인 예매를 중단한 뒤 직접 창구에서 귀성열차표를 판매한다.

올 설 귀성표 예매는 15일 경부, 충북, 경북, 대구, 경전, 동해남부선을, 16일 호남, 전라, 장항, 중앙, 태백, 영동, 경춘선을 진행했다.

이를 위해 많은 시민들이 새벽부터 서울역사를 찾아 대합실을 가득 메우는 북새통을 이뤘다. 이러한 명절 귀성표 예매 외에는 평상시 창구에서 승차권을 사려는 줄도 비교적 짧은 편이고 그보다 많은 여객들은 스마트폰으로 승차권을 발권한 뒤 ‘시크하게’ 시간 맞춰 서울역사를 빠져나가 차에 오른다.

○서울 소방관들의 ‘트라우마’ 숭례문 화재

▲ 1958년 남대문 앞을 조랑말 우마차에 벼를 싣고 서울시내로 들어가는 상인.
지난해 12월 복원중인 숭례문 보호막을 걷어내 전체 모습이 드라났다. 2008년 2월 이명박 대통령 취임식을 앞두고 소실된 지 5년만의 일이다.

▲ 2008년 2월 국보1호 남대문(숭례문)이 방화로 추정되는 화재로 인해 소실, 현장감식이 이루어지고 있는 가운데 주위를 지나던 시민들이 폐허가 된 남대문을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다.
숭례문은 토지 보상문제에 불만을 품었던 상습 방화범 채종기(당시 69세)가 불을 질러 전소되고 말았다. 그는 2006년 창경궁 문정전에도 방화해 400만원 상당의 피해를 입히고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것으로 알려졌으나 자신은 당시 범행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숭례문 방화는 자신이 저질렀다고 자백,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다.

숭례문 화재는 2월 10일 밤 10시 40분께 채 씨가 2층 누각으로 올라가 시너를 부은 다음 1회용 라이터로 불을 붙이면서 시작됐다. 소방당국은 당시 소방차 32대, 소방관 128명을 동원, 화재 진압에 나섰으나 발화 5시간 만인 11일 새벽 1시 54분 누각을 받치는 석축만을 남긴 채 모두 붕괴됐다.

▲ 방화로 소실돼 복원공사중인 국보 제1호 숭례문이 20일 오후 가림막을 철거하면서 전체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남대문은 지속된 한파로 공사가 지연돼 4월께 시민들에게 공개될 예정이다.
숭례문 관리 책임자였던 유홍준 당시 문화재청장은 유럽 방문을 마치고 귀국길에 오르던 중이었다. 유 전 청장은 숭례문 소실의 책임을 지고 퇴임했다.

그는 나중에 “유럽 출장을 하지 않고 화재 현장에 있었다면 기와를 벗기고 진압하라고 지시해 전면 소실을 막았을 것”이라고 털어놓았다.

현장에 있던 소방당국에서도 누각의 기와를 벗겨야 완전한 화재진압이 가능할 것으로 판단했으나 일시적으로 화재가 더 커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누구도 지시를 내리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국보 제1호의 화재 진압 과정에서 ‘과잉진압’이었다는 오명을 쓰기 싫었기 때문이다.

숭례문 화재는 지금도 서울소방재난본부의 ‘트라우마’로 남아있다. 숭례문 화재 당시 현장에 나가있던 소방공무원 이종문 씨는 지난해 1월 밀폐된 화재 현장에 고압 분사노즐로 구멍을 뚫고 이산화탄소를 분사해 불을 끄는 골목형 소방차를 개발했다.

숭례문 화재 당시 이러한 장비가 있었다면 누각 기와를 벗기지 않고도 내부의 화재를 완전히 진압,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

국보 제1호 숭례문은 오는 4월 복원 공사를 마치고 공개될 예정이다. 하지만 복원된 숭례문은 1395년(태조 4) 짓기 시작해 1398년(태조 7) 완성한 옛 모습을 찾을 수 없게 됐다.

숭례문은 1447년(세종 29)과 1479년(성종 10) 보수공사를 진행했고 1961∼1963년 대대적으로 해체, 수리했으나 615년 전 세워진 원형을 간직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문화유산이었다.

지금 원형대로 남아있는 구조물은 홍예문과 석축, 그리고 1층 문루 일부뿐이다.

○외국인 관광객 더 많은 남대문시장

▲ 남대문시장은 민족 최대의 명절인 설날 직전과 추석 직전 가장 많은 시민들이 찾는 대목을 이룬다.
남대문시장은 서울의 대표적인 관광명소로 꼽힌다.
얼굴이 희고 키가 좀 작은 20대 여성은 남대문시장에서 어김없이 일본어로 말을 거는 호객꾼에게 잡히곤 한다.

일본인 분위기가 난나는 이유만으로 유창한 일본어 호객을 당할 만큼 남대문시장은 일본인이며 중국인, 미주와 유럽 관광객이 많이 찾는다.

점포마다 일어와 중국어 등 간단한 회화를 하는 직원들이 포진해 있고 간판부터 다국어로 써 놓았다. 그렇다고 서울시민이나 다른 지방에서 올라온 손님이 적은 것도 아니다.

남대문시장은 이른바 ‘흔들어 팔기’에 나선 상인을 가장 쉽게 볼 수 있는 재래시장이다. 온갖 옷가지를 파는 점포에서는 턱 아래 마이크를 찬 장꾼이 옷을 흔들며 속사포 내레이션을 앞세워 손님들을 모은다.

그가 흔드는 옷가지와 고저강약에 자음과 모음까지 맞춰 악센트를 주는 내레이션을 듣다보면 언제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 정도다.

남대문시장은 또 외식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기 시작한 1990년대 후반부터 서울의 대표적인 식당가로도 알려지기 시작했다.

▲ 갈치조림.
시장의 대표적인 먹을거리는 숭례문 뒤쪽 숭례문수입상가와 대영유통 사이 골목이다. 먼저 ‘희락’ 등을 비롯한 몇몇 작은 식당에서 팔던 갈치조림이 알려지면서 남대문 갈치골목으로 자리잡았고, 강원집의 닭곰탕. 진주집과 은호식당의 꼬리곰탕, 한순자손칼국수를 비롯한 칼국수골목, 부원면옥의 평양면옥,  우모촌의 메밀정식 등 양손으로 꼽기 어려울 정도다.

이들은 당초 자리를 비우지 못하는 시장 상인들에게 일일이 배달하는 식당으로 자리 잡았으나 이제 외국인 관광객들까지 밀려드는 서울의 명소가 됐다.

작은 식당에서 옆사람과 어깨를 부비며 앉아 고춧가루 범벅인 갈치조림을 먹고 진땀을 흘리면서도 “오이시”라고 외치는 일본 여성들도 끊임없이 이어진다.

○1977년 대화재로 다시 태어난 시장

▲ 남대문시장은 과거 국내 안경제조업체들의 도매시장 역할을 해왔다. 물류가 발달한 최근까지 남대문은 여러 안경원이 밀집해 시중가보다 싼 가격에 안경을 맞출 수 있다.
남대문시장에는 유난히 안경원이 많다.
2000년대 초까지 우리나라 안경산업의 집산지인 대구에서 안경렌즈며 테 등을 남대문시장으로 싣고 와 전국 각지로 유통했기 때문이다.

당시 전국의 안경원은 지역별로 구매조합 형태의 모임을 만들어 대표자가 직접 남대문시장 안경도매업체를 찾아 상품을 구매해 갔다.

물류가 발달하면서 과거와 같은 모습은 찾기 어렵지만 당시 만들어진 안경특화거리의 모습은 지금도 몇몇 안경원으로 남아있다. 지금도 이들 안경원은 시중보다 저렴한 가격대로 손님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 한류를 타고 몰려든 일본과 중국인 관광객이 많이 찾는 남대문시장의 전통식품 매장.
안경과 마찬가지로 남대문시장의 가장 큰 강점은 물건 값이 시중에 비해 싸다는 점이다. 남대문시장에서 유통하는 상품은 각종 의류를 비롯하여 섬유제품·주방용품·가전제품·민예품·토산품·농수산물·각종 식품·일용잡화 및 수입상품 등 무궁무진하다.

이러한 상품을 찾는 고객은 국내 소매상이나 시민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아메리카는 물론 유럽에까지 퍼져 있다. 남대문시장의 많은 점포는 상품을 직접 생산·판매하는 독립적인 기업체이기도 하다. 때문에 유통비용이 적게 들고 양질의 상품을 다른 곳보다 싸게 판매한다는 강점이 있다.

이 시장은 1414년(태종 14) 만든 정부임대전(政府賃貸廛)을 효시로 한다. 이후 1608년(선조 41) 대동미(大同米)·포(布)·전(錢)의 출납을 맡아보는 선혜청(宣惠廳)을 지금의 남창동에 설치, 지방의 특산물 등을 매매하는 시장으로 발전했다.

본격적인 상업활동이 시작된 것은 시전(市廛)이 들어선 뒤부터다. 지금의 시장 모습은 1977년 9월 대화재 이후 지하 3층 지상 25층의 남대문시장 현대화계획에 따라 만들어졌다.

당시 화재로 발화점인 중앙상가 C동에 입주해 있던 351여개 점포가 전소됐고 공식적인 추계 재산피해만 1억 5000여만 원, 상인들의 추산으로는 20억여 원 정도의 피해를 입혔다. 지금의 화폐가치로 따지면 100억 원 이상의 피해를 입을 셈이다.

○도성 안팎 백성들 투석전 벌이던 고개

▲ 만리동은 택시기사들이 가장 가기 싫어하는 동네로 꼽힐 정도로 복잡한 골목길이 이어진다.(오른쪽) 1927년 문을 열어 외조부와 아버지를 거쳐 3대에 걸쳐 운영되고 있는 만리동 고개의 성우이용원.
“가끔 저 동네 안쪽까지 들어가자는 손님이 있으면 참 난처합니다.”
서울역에서 마포로 넘어가는 만리재를 지나던 택시 기사가 만리동 쪽을 보며 하는 말이다.

만리동은 서울의 택시 기사들이 들어가기 꺼리는 좁고 가파른 골목길로 이루어져 있다. 만리동에는 좁은 골목에 어울리는 옛 이발관이 남아있다. 1927년 문을 열어 외조부와 아버지를 거쳐 3대에 걸쳐 운영되고 있는 만리동 고개의 성우이용원이다.

성우이용원은 86년 전 세운 자리에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모습으로 남아있다. 이곳에서는 지금도 바리캉과 가위, 날이 시퍼렇게 선 면도칼로 이발과 면도를 한다. 머리를 깎고 나서 수돗물이 나오는 타일 개수대로 허리를 숙이고 목을 쭉 내밀어 고개를 숙이는 머리감기도 예전 그대로다.

이발사는 손님의 머리를 감겨준 뒤 난로 위 물통에서 데운 물과 찬물을 섞어 주루륵 헹궈주고 머리카락을 대충 툭툭 털어 말린다. 나머지 깔끔하게 머리를 말리는 일은 손님 몫이다.

‘드라이’까지 할 경우라야 젖은 머리인 채로 다시 이발 의자에 앉아 이발사의 능숙한 헤어드라이질에 머리를 맡긴다.

이제 서울에서도 종로3가 낙원상가 앞 노인 상대 이발관 등 몇몇 남지 않은 풍경이다.
만리동의 성우이용원은 그동안 방송에도 여러 차례 소개됐고, 지금도 사진기를 둘러멘 아마추어 포토그래퍼들의 단골 출사지가 되고 있다.

만리동은 세종대왕 때 한글창제에 극력 반대하던 최만리가 이 부근에 살았었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라는 설도 있다. 최만리는 세종26년(1444) 훈민정음을 반포하자 “우리 조선은 지성스럽게 대국(大國)을 섬기어 한결 같이 중화(中華)의 제도를 준행(遵行)하였는데, 언문을 창작하신 것은 보고 듣기에 놀라움이 있습니다.”라며 극렬하게 반대했다.

최만리의 집 터 등은 확인되지 않았으나 이 고개가 조선시대 정월 대보름마다 도성 안 백성들과 도성 밖 애오개 근처에 살던 백성이 투석전을 벌였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당시 돌팔매질로 승부를 벌이는 투석전은 도성 쪽 사람들이 이기면 경기도에 풍년이 들고 애오개 쪽 사람들이 이기면 8도에 풍년이 든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경기도의 한 복판에 있는 서울 백성으로서는 어느 쪽이 이기든 모두 풍년이 드는 셈이다. 그래도 만리재의 투석전이 벌어질 때면 용산이나 마포, 서대문 쪽 백성들도 몰려와 애오개 백샹들을 응원했다고 한다.

만리동에는 1918년 개교한 양정고등학교가 있던 곳이기도 하다. 양정고는 현재 양천구 목동으로 옮겼고 옛 학교 자리에는 손기정체육공원이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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