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함께 돌자 서울 한바퀴 (18) 관악구
다함께 돌자 서울 한바퀴 (18) 관악구
  • 이인우 기자
  • 승인 2013.02.15 11: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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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서 가까운 행운동 떠나는 사람들, 다시 찾아오는 사람들
▲ [포털 다음 지도 갈무리]

관악구는 유민(流民)들의 땅이라는 이미지가 먼저 떠오른다. 이곳에 뿌리 내리고 살아온 시민들에게는 도리가 아니지만 거리를 떠도는 사람들의 행렬이 만든 이미지다.

지하철2호선 낙성대역에서 신림역까지는 남부순환도로와 같은 노선을 밟는다. 지상과 지하철은 언제나 붐빈다. 동에서 서로, 서에서 동쪽으로 쉼 없이 오가는 사람들. 아침 출근시간이면 이 구간 지하철역은 밀고 밀리는 인파로 가득하다.

낙성대역 인근부터 신림역까지는 원룸형 다세대 주택이 밀집해 있다. 이곳 7~8평 남짓 원룸의 세대주는 대학생뿐만 아니라 젊은 직장인들로 넘쳐난다. 모두 졸업이나 이직, 결혼 등의 이유로 관악구를 떠날 사람들이다.

또 녹두거리로 알려진 신림동 고시촌의 고시생이나 공시생들도 이 거리를 떠날 날을 희원(希願)한다. 재개발에 밀려 이미 관악구를 떠났거나 재개발조합에 무릎 꿇은 가난한 세입자들도 오래지 않아 짐을 꾸려야 한다.

관악구의 남부순환로와 수많은 이면도로, 골목길, 그리고 도림천변은 서울의 유민들로 채워지고 또 비워진다. 관악구는 유민의 땅이다.

○조세희의 행복동과 관악구 행운동

▲ 사당역에서 오르다 바라본 관악산 정상 연주대의 모습.
2008년 관악구의회는 행정동 이름을 바꾸는 조례를 시행했다. 행정동명 변경은 관악구 주민들의 숙원사업이었다.

관악구 주민들은 봉천동과 신림동에서 떠오르는 도시빈민의 인상을 지우고 싶어 했다. 한 때 먼 지방에서조차 봉천동은 가장 가난하고 낙후된 동네로 여겼다. 설탕 3스푼에 크림 2스푼을 넣은 인스턴트 커피는 ‘봉천동 스타일’, 블랙 커피는 ‘압구정 스타일’이라고도 했다.

▲ 관악소방서가 2012년 1월 서울 관악산에서 동절기 산악 인명구조역량 강화훈련을 하고 있다. (사진=관악소방서 제공)
험한 관악산 아래 하늘을 떠받든 형상에서 따온 봉천(奉天)이란 뜻은 잊혀졌다. 단지 어감조차 어딘지 촌스럽다는 인상만 남았다. 이 때문에 봉천동 주민들은 오래 전부터 동명을 아예 바꾸길 바랐다.

그래서 바꾼 이름이 보라매동(봉천1동)과 성현동(봉천2동·봉천5동), 청림동(봉천3동), 청룡동(4동·봉천8동), 행운동(봉천6동), 낙성대동(봉천7동), 은천동(봉천본동·봉천9동), 인헌동(봉천11동) 등이다.

행운동은 희망과 행운이 가득하라는 뜻에서 지은 이름이다. 주민들의 의견을 들어 정했다. 행운동은 동작구 동쪽 경계를 이루는 까치고개 인근 서울미술고에서 서울대입구역까지 구간의 북쪽이다.

관악산 산자락을 끊어 남부순환로가 동서로 지나고 그 건너편 북쪽이 바로 행운동이다.
행운동은 ‘행복동’으로 잘못 알려지기도 했다. 행복동은 조세희 씨가 1975년부터 1978년까지 쓴 연작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 나온다. 행복동은 산업사회에서 밀려난 소외계층이 살아가는 마을이다.

▲ 청림동의 재개발 고층아파트와 옛 단층 주택가 골목이 대조를 보인다.
노비집안의 후손인 난장이는 1970년대 박정희의 노동자를 볼모로 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희생양이다. 산업사회가 본격화 하면서, 못가진 자와 가진 자 구도가 ‘빈곤-풍요, 고통-안락, 피착취-착취, 어둠-밝음, 추움-따뜻함’ 등으로 병치된다.

난장이는 “사랑으로 일하고 사랑으로 자식을 키우”고 싶어 한다. 반면 거인 자본가의 손자인 경훈은 “사랑으로 얻을 것은 하나도 없다”고 말한다.

사실상 난장이가 그리는 사랑으로 일하는 세상은 아직 오지 않았다. 그런 세상이 오는 길은 ‘사랑으로 얻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는 거인들이 가로막거나 파괴하기 일쑤다.

난장이의 아들 영수는 그래도 말한다.
“나는 은강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머릿속부터 변혁시키고 싶은 욕망을 가졌다. 나는 그들이 살아가는 사람이 갖는 기쁨·평화·공평·행복에 대한 욕망들을 갖기를 바랐다. 나는 그들이 위협을 받아야 할 사람은 자신들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기를 바랐다.” - <잘못은 신에게도 있다> 중에서

관악구에는 난장이가 사는 마을이 떠오르는 행운동이 있다.

○강제철거 없다던 쑥고개 세입자들 어디로

▲ 폐허가 된 이전의 쑥고개 시장.
쑥고개는 거인들에게 밀려나는 난장이 가족의 슬픔이 현재진행형으로 계속되는 곳이다.
쑥고개는 숯가마가 많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 고개에서 숯을 구워 등짐에 지거나 우마차에 싣고 노량진을 거쳐 한양 도성까지 나가 팔았다.

행운동에서 남부순환로를 건너 남서쪽에 있는 쑥고개는 오래 전부터 가난한 세입자들이 모여 살던 동네였다.

그들은 동네 안에 있는 쑥고개시장에서 하루치 콩나물과 두부 한 모를 사고 배추를 사 김치를 담그기도 했다. 쑥고개시장은 이제 굴삭기 삽날로 허물어진 폐허로 변했다. 골목골목의 단독주택도 주민이 떠나 을씨년한 모습으로 방치되고 있다. 조만간 이곳은 서울 곳곳에 들어선 고층아파트 단지로 탈바꿈한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지난해 6월 쑥고개 세입자들에 대한 강제철거를 막았다고 자신의 페이스북에 공개했다. 박 시장은 “그저께(6월 27일) 오후에 귀국한 저의 트위터에 몇 개의 글이 내 눈을 사로잡았다”며 “봉천 12-1 주택재개발구역의 23가구 강제철거가 어제 예정되어 충돌이 예상되고 용산참사의 악몽이 상기된다는 것이었다”라고 전했다.

이어 “비서실장에게 꼭두새벽에 전화를 걸어 현장의 상황을 점검하고 확인해 달라는 요청을 했다”며 “만약 강제철거가 개시될 예정이라면 내가 다른 일정을 모두 취소하고 현장을 가서 당사자들의 의견을 청취해 볼 것이라는 엄포까지 포함해서 강제철거 중단의 의지를 분명히 했다”고 밝혔다.

박 시장은 또 “수십 년 살던 주민들 입장에서 자신들의 삶의 뿌리가 뽑혀져 나가는데 행정의 편의라는 이름으로 강제철거라는 무기에 의지하던 과거의 행정 관행은 바뀌어야 한다”며 “외국에서 대규모 개발이 이루어지는데 수십 년이 걸리는 데에는 이런 온전한 합의를 중시하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그 후 수십 년 이 아닌 5개월 여가 흐른 10월 쑥고개 세입자대책위의 주민들은 재개발조합과 이주비용 1000만 원~1500만 원을 받기로 하고 합의서에 도장을 찍었다.

나경채 관악구의원(진보신당)은 당시 이에 대해 “법적으로 보장된 이주비를 받는 일은 서울시가 충분히 조정할 수 있었던 일”이라고 지적했다.

세입자대책위가 조합에 대해 정당한 이주비와 임대아파트 보장을 요구하며 이주를 거부하여 협상을 시작했으나 지지부진하던 중, 세입자대책위 부위원장을 비롯한 회원들이 위원장 몰래 조합과 협상을 했다는 것이다.

당초 강성 입장을 보였던 세입자대책위 위원장은 며칠 후 조합장을 찾아가 무릎을 꿇고 빌었다.
나 의원의 표현에 따르면 “감히 세입자 주제에 하늘같은 ‘토지 등 소유자’에게 개긴 죄, 세입자 대책위를 만들어 ‘토지 등 소유자’들이 만든 ‘조합’을 능멸한 죄, 하늘 위의 하늘같은 시공업체와 철거업체의 공기를 늘어나게 한 씻지 못할 죄에 대해 용서를 빌었”다는 것이다.

난장이가 작은 공을 쏘아 올린 지 37년이 지난 2012년 가을, 행운동 옆 마을인 천룡동(봉천4동)에서 벌어진 일이다.

○로스쿨에 밀려 흩어지는 고시생들

▲ 신림동 고시촌으로 향하는 신림로.
쑥고개에서 언덕길 하나만 넘어서면 서림동(신림2동)이다. 서림동은 대학동(신림9동)과 함께 ‘신림동 고시촌’으로 알려진 곳이다.

‘신림동 고시촌’은 서울대입구에서 멀지 않은 서림동에서 대학동까지 이어진 길 양쪽 동네를 말한다. 한 때 이 거리는 녹두거리라고도 불렀다. 녹두거리는 고시생들이 주머니를 털어 막걸리를 마시던 녹두집이라는 주점에 유래한 이름이다.

가난한 고시생이라는 신분과 전남 고부에서 들고 일어났던 녹두장군 전봉준의 이미지가 겹친다.
지금도 ‘신림동 고시촌’의 밥값, 술값은 서울에서 가장 싼 편이다. 식당마다 작은 노트에 한 끼를 먹을 때마다 사인해 두고 나중에 한꺼번에 계산하는 ‘월식’도 아직 남아있다.

이런 식당은 양이 푸짐할 뿐만 아니라 밥맛도 떨어지지 않는다.
고시생들에게 한 번 찍히면 영업이 힘들기 때문에 식당 주인들이 신경을 쓰기 때문이다. 식당 주인들은 그보다 매일 보는 고시생들에게 하나라도 더 먹이고 싶은 마음 때문이라고 한다.

신림동 고시촌은 그러나 오래 있을수록 서로에게 불편한 관계가 된다. 주민들은 고시생들이 하루라도 빨리 시험에 붙어 떠나길 바란다. 고시생들 자신은 더 말할 나위 없다.

수년째 붙박이 생활을 하는 고시생들은 고향에서의 지원도 거의 끊어지면서 고시원 총무로 일해 숙박비를 충당하기도 한다.

‘신림동 고시촌’은 법학대학원이 생기면서 된서리를 맞았다. 한 때 사법시험 준비생만도 5만여 명에 이를 정도였으나 지금은 1만5000여 명 정도만 남은 것으로 추산된다. 한 때 사법고시와 행정고시 합격자를 많이 배출한 곳으로 이름 높았던 고시독서실들도 정원의 절반을 채우지 못하고 있다.

▲ 봉천동 낙성대역 인근은 편리한 교통을 앞세워 10여년 전부터 원룸촌으로 자리잡았다. 침대와 책상, 냉장고, 세탁기, 에어컨 등을 갖춘 풀옵션 원룸은 학생뿐만 아니라 젊은 직장인들의 주거 비율이 매우 높다.
몇 년전 우후죽순 들어섰던 원룸형 주택도 다른 지역과 달리 월세를 낮추는 실정이다. 한 원룸형 주택은 당초 보증금 300만 원, 45만 원에서 지난해 말 각각 100만 원, 35만 원으로 낮췄다.

인근 음식점들도 마찬가지다. 2년 전까지는 매 끼니 때마다 60명 정도의 고시생들이 식사하던 한 국밥집은 최근 20여 명까지 손님이 줄어 매출이 1/3 수준으로 떨어졌다.  이런 고시촌의 퇴락 조짐에 관악구청까지 나서서 활성화 방안을 찾고 있으나 당장 뾰죽한 대책을 내놓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신림동 고시촌’은 1975년 서울대가 관악캠퍼스로 이전한 뒤 1980년대 초반부터 도림천 변으로 고시생들이 몰리면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졌다.

그동안 수많은 사시와 행시 합격자를 배출하면서 지방에서 올라와 길게는 10년 가까이 체류하는 고시생도 많았다.

서울 후미진 동네 골목에서 먹고 자며 자신의 노력만으로 신분의 벽을 뚫고 오르고자 했던 ‘도림천의 예비 용(龍)’들이 하나 둘 떠나고 있다.

○북두칠성 별 하나 떨어진 낙성대

▲ 하늘에서 별이 떨어지는 꿈을 꾼 뒤 강감찬 장군을 낳았다는 낙성대의 생가터.
낙성대역에는 타일조각을 맞춰 강감찬 장군을 묘사한 그림이 있다. 장군이 탄 말 발굽 아래는 거센 물살에 떠내려가는 적병들이 점점이 박혀있다.

인근에 있는 강감찬 장군의 탄생지 낙성대를 기념하는 타일 그림이다. 강감찬 장군은 무신이 아니라 문신이었다. 고려 초기인 948년 태어나 35세 때인 983년 과거에 급재해 관직에 나섰다.

그는 신라시대 5대조 강여청부터 살아온 지금의 낙성대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 강궁진(姜弓珍)은 태조 왕건을 도와 고려 건국에 공을 세워 벽상공신이 되면서 명망가 집안을 일궜다.

고려사에 전하는 강감찬 장군의 탄생설화는 다음과 같다.
<어떤 사신(使臣)이 한밤중에 큰 별이 어떤 집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 사람을 보내어 찾아보게 하니, 마침 그 집 부인이 사내를 낳았었다. 이 말을 듣고 사신이 마음속으로 신기하게 여기고 그 아이를 데려다가 길렀는데 그가 바로 강감찬으로 재상이었다.>

어떤 사신이 보았다는 ‘별이 떨어진 자리’는 지금의 봉천동 218번지였다. 이후 낙성대(落星垈)를 조성한 자리는 봉천동 산48번지로 옮겼다.

강감찬 장군은 거란의 소배압이 이끄는 10만 대군을 흥화진에서 격파한데 이어 귀주(평안남도 개천과 평안북도 영변 사이에 있는 청천강변의 옛성)에서 수천 명을 남겨두고 몰살시켰다.

강감찬 장군은 이후 한양 판관으로 일하면서 중으로 변신한 늙은 호랑이를 꾸짖어 호환을 없앴다는 이야기 등으로 전해진다.

낙성대는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4호로,  1973년 사당 안국사(安國祠)를 지어 강감찬 장군의 영정을 모셨다.

낙성대에 있는 3층 석탑은 당초 강감찬 장군이 태어난 집 터에 있던 것으로 임진왜란 당시 왜군들이 석탑의 대석을 비틀어 어기고 탑의 위층을 빼어 한 층을 낮춰 정기를 줄이고 탑 안에 있던 보물을 훔쳐갔다는 일화가 있다.

왜군들은 탑 주위에 있던 병풍바위와 선돌바위도 모두 부수고, 탑의 동쪽 구릉을 파내어 땅의 혈맥을 끊었다고 한다.

○재래시장 온기 남아있는 봉천동

▲ 옛 원당시장에서 인헌시장으로 이름을 바꾼 낙성대역 인근의 작은 재래시장은 규모에 비해 동네 주민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지금 쑥고개시장은 철거됐지만 관악구에는 아직 많은 재래시장이 남아있다.
낙성대역 남쪽 관악산 기슭인 인헌동(봉천11동)의 인헌시장은 그리 크지 않지만 단골 손님이 많기로 유명하다.

이 시장은 당초 원당시장이었지만 최근 동명이 바뀌고 재래시장 지원이 시작되면서 이름까지 바꿨다.
인헌시장에는 마을 주민들과 인근 수많은 원룸형 주택의 세입자들, 그리고 맛있는 식당을 찾아온 시민들까지 들락거린다.

▲ 인헌시장 분식점 좌판의 어묵은 겨울철 지나는 행인을 유인하는 주인공이다.
이런 시장은 하다못해 어묵이나 찐빵, 만두까지도 한 번 이름이 나면 손님들이 몰려오기 마련이다.
인헌시장이 잘 되는 이유는 원룸형 주택 세입자들이 주요 고객이기 때문이다. 젊은 직장인이나 학생이 대부분인 세입자들은 아직 자기 차를 갖지 않은 경우가 많다.

때문에 먼 대형할인마트를 찾기보다 가까운 시장에서 그때그때 필요한 식자재나 생필품을 구입하는데 익숙하다.

주말이면 인근 소규모 아파트단지의 주부들과 남녀 직장인, 학생들이 몰려나와 길지 않은 시장 거리를 가득 메운다. 유난히 젊은 계층이 많다는 점에서 다른 재래시장과 구별된다.

시장 안에 있는 가구나 생필품 상가는 새로 원룸을 구해 이사온 이들이 주로 찾는다. 이들은 상가에서 침대보며 수건이며 비누곽, 간단한 공구 등을 주로 구입한다.

하지만 이런 입주민들도 인터넷 쇼핑을 많이 이용하면서 상가의 점포는 점차 줄어드는 추세다. 젊은 소비자가 많을수록 오프라인 매장의 매출은 떨어지게 된다는 공식이 현실화되는 셈이다.

하지만 재래시장 특성을 살려 성공한 점포도 많다. 인헌시장 중간쯤에 있는 ‘미도정육점’은 지하에 테이블을 놓고 한우를 싼 가격에 내놓아 한 때 미식취미를 가진 젊은이들에게 유명세를 떨쳤다.

지금은 서울에도 정육점 식당이 워낙 많이 생겨 예전만 못하지만 아직 저녁 무렵이면 지하 식당이 손님들로 가득 찬다.

또 7~8년 전까지 직접 어묵을 만들어 팔던 작은 점포는 매장을 크게 늘려 ‘매운 오뎅’ 등을 내세워 시장 명물로 자리 잡았다.

시장 입구 동네 횟집도 주말 관악산을 찾는 등산객들에게 알려지면서 계속 번창하고 있다. 이들은 관악구라는 지역 특성을 살린 재래시장 상인들의 성공사례다.

○서울에서 두 번째 복잡한 지하철역

▲ 지하철 2, 4호선 환승역인 사당역은 시민들이 뽑은 '출근시간 서울에서 가장 복잡한 역' 2위에 올랐다.
낙성대역에서 남부순환로를 따라 동쪽으로 가면 까치고개 아래인 동작구 사당동이다. 사당동의 지하철2호선 사당역은 신로림역에 이어 서울에서 가장 복잡한 환승역으로 꼽힌다.

매일 아침 출근시간마다 사당역은 시내로 들어가는 직장인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이들 직장인들은 2호선에서 4호선으로, 4호선에서 2호선으로 갈아타기도 하고 지상 광역버스정류장을 통해 들어온 수도권 시민들도 합세한다.

▲ 사당역은 수원과 안양, 과천 등 수도권 남부 지역 주민들의 지하철, 버스의 환승 지역으로 출퇴근 시민들이 장사진이다.
사당역 버스정류장 또한 멀리 수원부터 안양, 과천으로 이어지는 노선에 따라 언제나 버스를 기다리는 긴 줄을 이룬다.

사당역에서 수원까지는 좌석버스로 불과 30여분 밖에 걸리지 않는다. 이 때문에 서울로 출근하는 수도권 남부 주민들이 사당역으로 몰려든다.

출근시간 대다수 지하철 승객은 2호선 강남 방향과 4호선 광화문 방향에 집중된다. 반대편 노선은 사당역쯤에서 텅텅 빈 채로 달리기 마련이다.

저녁 시간이면 출근 전쟁을 치렀던 시민들이 환승을 앞두고 사당역 인근 술집을 찾으면서 일대는 먹거리촌으로 변신한다.

사당역 인근은 1990년대 초부터 남태령 고개로 서울과 경기도를 가르면서 크고 작은 술집이 많았다. 당시는 남태령 쪽으로 넓은 주차장이 있었고 저녁이면 대단위 포장마차 촌으로 변신했다.

당시의 포장마차촌이 우후죽순 세운 빌딩으로 바뀌었어도 빌딩마다 들어찬 술집은 서울과 경기도를 넘나드는 시민들의 휴식 공간 역할을 대신한다.

 

○고려 유민들 개경 그리던 연주대

▲ 관악산 정상 연주대 아래 연주암은 과천시를 내려다보고 있다.
사당역에서 남서쪽으로 조금 가면 관악산 정상까지 가장 가까운 코스가 나온다. 이곳에서 관악산 정상인 연주대(632m)까지 천천히 걸어도 2시간 30분 정도면 갈 수 있다.

관악산은 북한산을 마주보는 산으로 ‘화기(火氣)’가 강하다는 이유로 한양을 도읍으로 정하기 어렵게 하기도 했다. 당시 정도전 등은 남대문과 경복궁 등에 물을 상징하는 해치 조형물을 세워 관악산의 화기를 피하려 했다.

하지만 경복궁은 1592년 임진왜란으로 소실돼 흥선대원군이 중창하기 전까지 폐허로 남았었고 남대문마저 2008년 전소됐다. 관악산은 ‘불의 산’이란 말에 걸맞게 흰 암봉으로 이루어진 산이다.

곳곳에 절벽과 거대한 바위가 온갖 형상을 지어내고 작은 소나무가 그 틈에 뿌리내리고 있다. 관악산은 보기보다 오르기 쉬운 산도 아니고 그렇다고 어려운 산도 아니다.

▲ 서울 신림동 관악산 등산로는 봄 가을철이면 형형색색의 등산복을 입은 시민들이 물결을 이룬다.
주말에는 간혹 단화를 신고 치마 차림으로 연주대까지 오른 젊은 여성까지 눈에 띈다. 대부분 기능성 등산복을 갖춰 입은 산행객 틈에서 그런 여성은 더 돋보이기 마련이다.

하지만 워낙 암벽이 많아 관악소방서 등은 이곳에서 산악구조훈련 등을 진행한다. 또 때때로 무리한 릿지등반을 하다 실족, 크게 다치거나 목숨을 잃는 시민도 나온다.

관악산 정상의 연주대는 죽순 모양의 기암절벽 위에 석축을 쌓고 세운 암자 이름이다. 의상대사가 문무왕 17년(677) 암자를 세우면서 ‘의상대’라고 했으나 조선에 반대하던 강득룡과 서견·남을진 등 고려 유신이 이곳에 모여 개경 쪽을 바라보며 그리워해 연주대(戀主臺)로 이름을 고쳐 불렀다는 설도 있다.

날씨 좋은날 연주대에 오르면 멀리 인천 앞바다까지 볼 수 있다. 관악산은 사당역 코스뿐만 아니라 서울대 교수아파트나 낙성대 등에서도 오를 수 있다. 또 과천 정부청사 뒤에서 팔봉능선 쪽으로 올라 관악구로 하산해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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