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함께 돌자 서울 한바퀴 (24) 동대문구①
다함께 돌자 서울 한바퀴 (24) 동대문구①
  • 이인우 기자
  • 승인 2013.03.29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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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문 밖 켜켜이 쌓인 조선왕조 흔적… 추억으로 이어지는 청량리역 기차 레일
▲ [포털 다음 지도 갈무리]

동대문구에는 동대문(흥인지문)이 없다. 동대문시장도 동대문구 관할이 아니다. 주말마다 벼룩시장이 열리는 동묘도 마찬가지다.

▲ 1976년의 천장산 아래의 경희대학교와 회기동, 이문동 일대 모습.
누구나 동대문구에 있을 거라 생각하는 동대문은 종로구에 속해있다. 1975년 창신동과 숭인동 등을 종로구에 편입하면서부터다. 서울시가 1조 원을 들여 옛 동대문운동장에 만들고 있는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도 동대문구와는 관련 없다. 동대문구로서는 억울하고 가슴 아픈 일이다. 마치 호부오형(呼父呼兄)하지 못했던 홍길동처럼 제 땅에 있어야 할 동대문을 엉뚱한 종로구에 빼앗긴 것과 같다.

헷갈리기는 시민들이 더 하다. 동대문 평화상가나 동대문종합시장 등으로 옷을 사러 나온 시민들은 대부분 자신이 동대문구에 와있는 줄 안다. 동대문 인근에서 가장 높은 두산타워에 들르는 시민들도 마찬가지다. 창신동과 숭인동이 종로구라는 사실을 알더라도 왕산로를 경계로 남쪽은 동대문구가 틀림없을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동대문구는 동대문에서 한참 남진한 뒤에야 들어설 수 있다.

동대문구는 하지만 동대문을 상징물로 쓰고 있다. 과거 성 밖에 있던 마을이었지만 성 안의 한양 백성들은 물론 왕실까지 동대문 밖 기름진 농토에서 지은 곡식에 의존했다. 도성 밖에 있었지만 도성보다 흥성했던 곳이기도 했다. 근대화 이후에는 서울의 동부에서 밀려들어온 이주민들로 북적이면서 가장 빠른 도시화를 진행한 곳도 동대문구다. 아직까지 동대문은 옛 것과 새 것이 공존하는 역사문화의 본거지이다.

○신학문 지원 나섰던 순헌귀비 엄씨

▲ 순헌귀비 엄씨.
동대문구에는 조선의 마지막 능원이 있다. 왕조의 몰락과 같은 시기에 조성된 능원에는 지울 수 없는 아픔이 배어 있다. 동대문구 홍릉로(옛 청량리동)에 있는 영휘원과 숭인원이다.

영휘원은 고종의 후궁인 순헌귀비 엄씨(1854∼1911)의 묘소다. 순헌귀비 엄씨는 명성황후의 시위상궁이었다.

그는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된 뒤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왕실을 옮긴 뒤(아관파천)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인 의민황태자를 낳았다. 일제는 의민황태자를 영왕(영친왕)으로 격하했다.

야사에 따르면 순헌귀비 엄씨는 아관파천 10년쯤 전 이미 고종의 승은을 입었다고 한다.

 당시 명성황후에 의해 궁에서 쫒겨났으나 을미사변 직후 다시 고종에게 돌아와 자신의 가마에 태워 파천을 단행했다는 것이다.

순헌귀비는 또 자신의 재산을 내놓아 진명여고와 명신여학교(현 숙명여대)를 세웠다. 지금의 양정고등학교이자 베를린올림픽의 영웅 고 손기정이 다녔던 양정의숙이 재정난에 허덕일 때 자신의 땅 200만 평을 기증하기도 했다.

▲ 고종의 계비(繼妃)인 순헌귀비(純獻貴妃) 엄씨(嚴氏)의 묘소. 영친왕의 아들 진의 묘소인 숭인원과 같은 경내에 있다. 순헌귀비는 명성황후의 시위상궁이었다가 을미사변 후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한 아관파천 당시 후궁이 됐다.
영휘원 옆에는 순헌귀비의 손자(의민황태자의 아들)인 이진의 묘 숭인원이 있다. 숭인원에 묻힌 이진은 의민황태자와 일본 황손인 이방자 여사 사이에 낳은 아들이었으나 8개월 만에 급사했다. 당시 대한제국 황실의 직계 대가 끊긴 것이다. 순종은 진의 죽음을 애석히 여기며 국상에 준하는 장레를 치르고 왕릉과 같은 묘를 쓰게 했다.

▲ 영휘원 담장은 덕수궁 돌담길 못지 않은 정취를 보여주고 있으나 대부분의 시민들은 무심코 지날 뿐이다.
영휘원과 숭인원은 세계 제국들의 틈바구니에서 황실과 나라를 지키려 했던 마지막 황제와 황세손의 넋이 깃든 곳이다.

○옛 능원 자리에 만든 국내 최초 수목원

▲ 조선의 역사를 지켜본 홍릉수목원에 있는 650년 전 중국 백송.
홍릉수목원은 우리나라에서 처음 만든 수목원이었다.
수목원 자리는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들의 칼에 시해된 1895년 을미사변 2년 후 시신을 모셨던 곳이다. 이후 1919년 고종황제가 승하한 뒤인 1922년 경기도 금곡 홍유릉으로 이장했고 지금은 과거 능터를 알리는 표지석만 남아있다.

▲ 동대문구 청량리동의 홍릉수목원은 수목원으로 명성황후의 능이 있던 홍릉 지역에 임업시험장을 설립하면서 조성됐다. 수목원 안에는 산림과학관이 있다.
홍릉수목원은 1922년 임업시험장을 만들면서 전국 각지의 종자·묘목을 모아 조성했다. 한국전쟁 당시 수목원은 대부분 파괴됐으나 1960년대 후반 다시 개발, 임업연구원에 딸린 전문 수목원으로 자리 잡았다. 지금 홍릉수목원은 침엽수원, 활엽수원, 관목원, 외국수목원 및 약초원, 고산식물원 등으로 나뉘어 관리되고 있다. 44㏊에 이르는 수목원 경내에는 총 157과 2035종(국내종 836종, 국외종 388종, 초본 811종)의 식물 2만여 개체를 키우고 있다.   

수목원 인근에는 경희대와 한국외국어대, 한국과학기술원(KIST) 경영대학, 한국개발연구원(KDI), 한국농촌개발원 등 대학과 연구원이 밀집해 있다. 하지만 인근 지역 주민들이 아닌 시민들은 대부분 고속화도로인 내부순환로를 따라 스쳐지나갈 뿐 일부러 수목원을 찾는 경우는 거의 없다.

홍릉수목원에서도 탐방 인원을 제한하는데다 평일에는 사전에 예약해야만 개방하고 있어 항상 고즈넉한 분위기다. 일요일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누구나 들러볼 수 있다. 입장료는 무료. 수목원 안에는 우리나라의 산림·임업 등에 관한 정보를 집대성한 국립산림과학관도 있다.

수목원이라면 멀리 퇴계원 광릉수목원만 생각하는 시민들이라면 한번쯤 동대문구 한복판에 있는 도심 속 홍릉수목원을 찾아볼만 하다.

○세종대왕 어진(御眞) 지키는 옛 영릉 무인석

▲ 세종대왕기념관 입구에 있는 옛 영릉 석물 가운데 무인석이 위풍당당한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지난달 27일 경북대 연구팀은 한 수집가가 일본에서 찾아온 유물이 세종대왕의 익선관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익선관 내피 사이에는 훈민정음이 찍힌 종이도 있다고 한다.

연구팀의 조사결과가 사실이라면 대단한 발견이다. 간송미술관에서 소장 중인 훈민정음 해례본보다 앞선 것으로도 추정해볼 수 있는 활자본을 발견한 셈이기 때문이다. 세종대왕은 다른 무엇보다 한글을 창제한 제왕이란 사실만으로 우리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인물이다. 그런 세종대왕을 기념하는 곳이 동대문구에 있다는 사실을 아는 시민은 그리 많지 않다.

▲ 세종대왕기념관.
동대문구 회기로 56(청량리동 영휘원과 홍릉수목원 사이)에는 능엄경언해(보물 제763호), 몽산화상법어약록언해(보물 제769호), 금강경삼가해(보물 제772-1호) 등을 소장한 세종대왕기념관이 있다. 대지면적 1만8,500㎡에 연면적 2,475㎡의 2층 건물이다. 세종대왕의 업적에 비하면 작은 규모다. 기념관은 일대기, 한글, 국악, 과학진열실 등 4개의 전시실과 강당, 열람실 등을 갖추고 있다. 일대기실에는 세종대왕의 어진(御眞)을 중심으로 재위 32년 동안의 업적을 그린 14폭의 병풍 등이 있다. 

가장 중요한 전시실인 한글실에서는 재위 당시와 이후의 한글관계 문헌을 전시하고, 훈민정음 창제의 참고 문헌 및 외국 문자의 탁본, 한글 기계화 관계 자료를 볼 수 있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들기 위해 외국 문자 탁본까지 들여와 연구했다는 사실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된다.

과학실에는 세종시대의 조판·인쇄 과정을 재현시킨 활자관계 유물을 비롯해 측우기·해시계·물시계 등의 발명품과 여러 천문 기구 및 지도 등을 진열하고 있다. 세종대왕이 농사를 돕기 위해 천문과 측우 등의 발명을 지원한 사실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이밖에 난계 박연을 시켜 아악을 집대성한 결과를 보여주는 국악실에는 세종 시대에 정비된 각종 국악기와 악사 복식 및 무용 복식, 진연청도 등이 있다.

▲ 세종대왕과 소헌황후 심씨의 합장릉을 1469년(예종 1년) 지금의 여주군 능서면으로 옮기기 전 현재의 서초구 내곡동 대모산 기슭에 있던 옛 영릉의 석물을 세종대왕기념관으로 옮겨놓았다.
기념관 정원에는 세종대왕신도비와 옛 영릉석물 12기를 보존하고 있다. 옛 영릉은 세종대왕과 소헌왕후의 세종대왕과 소헌황후 심씨의 합장릉을 여주군 능서면으로 옮기기 전 현재의 서초구 내곡동 대모산 기슭에 있던 릉이다.

영릉은 세조 당시 풍수지리로 볼 때 적합한 자리가 아니라는 중신들의 상소가 이어져  1469년(예종 1년) 여주로 이장했다. 이들 석물은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42호로 지정됐다.

○‘청량리 부르스’ 멜로디 사라진 재개발 구역

▲ 지난 2007년 '답십리길~롯데백화점간 도로개설공사'를 위해 '청량리 588'로 불렸던 집창촌을 철거하고 있다. [사진=서울 동대문구 제공]
‘늘어진 커텐 황혼에 젖어 / 화병 속에 한송이 국화 / 긴 하루 걸린 창에 앉아 / 타는 해를 바라보네 / 내 빈 밤을 음~ 채워줘요 / 부르스를 들려줘요 / 호사한 밤 아직 먼데 / 이쁜 꽃불 어디에 켤까’ <후략>
 

가수 명혜원이 1985년 포크 가요 동아리인 ‘제3지대’와 함께 엮은 스플릿 음반에 수록한 곡 <청량리 부르스> 가사 중 일부다. 발표 당시 이 곡은 가요계에 큰 파장을 던졌다. 정통 블루스 곡은 아니었지만 늘어지듯 흐느적거리는 보컬의 음색과 그 뒤를 따르는 기타 애드립은 흑인 블루스보다 더 처연하고 아련했다.

특히 속삭이듯 읊조리는 가사 중 ‘청량리’는 많은 남자들에게 또다른 함의(含意)로 다가왔다. ‘긴 하루 걸린 창에 앉아 / 타는 해를 바라보’는 여인이 누구냐는 것이다. 대부분의 성인 남자들은 ‘청량리 588’로 부르던 집창촌을 떠올렸고 병들어 지친, 나이 많은 윤락녀의 이미지를 훑어내 곱씹었다.

서울 토박이 화가 사석원은 지난 5월 소공동 롯데백화점 롯데갤러리 본점에서 가진 ‘사석원의 서울 연가’전(展)에서 ‘청량리588’에 얽인 추억담을 희화적으로 설명했다. 하지만 청량리는 즐거움이나 행복보다는 쓸쓸하고 슬픈 이미지가 먼저 떠오른다. 1990년대 말까지 1000여 명에 이르던 청량리의 성매매 여성들은 2004년 성매매방지법 제정 이후에도 일부 남아 있다가 2014년 완공 예정인 재개발 계획으로 지난해 말 대부분 사라졌다. 

▲ 서울역사박물관(관장 강홍빈)이 지난 2월 발간한‘서울생활문화자료조사 보고서’에 실린 1960년대의 청량리 신도극장 앞 모습.
청량리 주민들로서는 앓던 이를 뽑아낸 셈이다. 이에 앞서 2010년 청량리역사 신축공사가 마무리되면서 이미 집창촌 흔적은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청량리역을 중심으로 여행객과 취객들, 휴가 나온 군인들에게 접근하던 호객꾼도 사라졌다. 청량리588이 번성했던 이유 중 가장 큰 청량리역이 변화했고 법과 제도를 비롯한 사회 환경도 과거와는 너무 달라졌다.

오유석 성공회대 민주주의연구소 교수는 논문 ‘동대문 밖 유곽-청량리 588 공간 구성의 역사와 변화’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청량리 588이라는 물리적 공간은 그 속에 살아가는 인간행위의 도덕적·윤리적 잣대로만 볼 수 없다. 그곳은 한국 사회의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구성물이었다. 그곳은 ‘돈’이 남는 ‘장사’였고, 그래서 한국 사회가 지난 반세기 동안 이뤄 온 경제성장과 상당한 관계를 가졌으며, 지금도 그곳에는 ‘돈과 권력’이 작용하고 있다. 인생의 막장, 동대문 밖 청량리 588에서 쫓겨나는 여성들이 ‘사라진 588’로 ‘인생의 막장’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을 수 있는 사회가 되기를 바란다.”

○서울시민 청춘의 꿈 담긴 청량리역

▲ 중앙선과 영동선, 태백선, 경춘선의 출발역인 청량리역은 서울과 강원도, 경북 동북부 지역을 잇는 철도교통의 중심이다.
청량리역은 서울시민들에게 ‘춘천’과 ‘정동진’을 연결하는 낭만여행 시발역이다.
수많은 서울의 대학 출신들이 청량리역에 모여 청평과 가평, 강촌을 거쳐 춘천으로 가는 MT를 떠났다. 그 추억을 더듬어 대학을 졸업한 뒤에도 굳이 기차를 타고 춘천을 찾는 시민이 적지 않다. 코레일은 이들을 노리고 ITX청춘열차라는 2만5000원짜리 상품을 판매하고 있다.

▲ 청량리역에서 무궁화호 열차를 타기 위해 줄을 선 시민들의 모습. 청량리역 플랫폼은 많은 시민들의 추억을 담고 있다.
하지만 40대 이상 나이의 시민들은 과거 덜커덩 거리며 달리던 비둘기호의 춘천여행길을 잊지 못한다. 비둘기호가 무궁화호로 바뀐 것도 모자라 이제 모두 전기구동차만 달리게 됐으니 의자 하나에 서너 명 씩 포개 앉아 통기타를 치던 추억은 낡은 앨범의 사진으로만 남게 됐다.

매년 겨울 정동진으로 떠나는 해돋이 열차도 매번 객차를 가득 채운다. 1990년대 중반 드라마 ‘모래시계’로 알려진 정동진은 1996년까지 작은 대합실에 연탄난로를 피웠지만 지금 그 모습은 흔적도 없다. 하지만 옛 모습을 알 리 없는 젊은 여행객들은 밤늦게 청량리역으로 모여든다.

▲ 청량리역은 2010년 3월 새로운 역사를 개장해 옛 모습은 추억으로만 남아 있다. 많은 시민들이 복잡하고 촌스러운 옛 역사의 정취가 사라진 점을 아쉬워하고 있다.
청량리역을 출발한 열차는 최소 6시간 이상을 달려 동해안 작은 역에 이들 여행객을 내려놓는다. 서울에서 정동진까지는 자동차로 가면 3시간쯤 걸린다. 하지만 정동진행 밤 열차를 찾는 시민들은 줄어들지 않는다. 기차여행이 주는 특별한 정감을 찾기 위해서다.

정동진행 열차는 태백을 지나 나한정역에서 도계역까지 가파른 태백산맥 동쪽 사면의 스위치백 구간을 지났었다. 하지만 이 구간에 솔안터널이 개통되면서 스위치백 구간은 폐선됐다. 앞으로 인근 대단위 리조트인 하이원에서 스위치백 리조트로 개발한다고 한다. 청량리에서 동해로 나갈 때마다 만나는 추억의 장소 하나가 또 사라지게 됐다.

청량리역에서는 멀리 배흘림기둥이 있는 부석사 무량수전으로 가는 경북 영주까지 가는 열차도 출발한다. 문제는 이들 열차가 남쪽으로 곧장 내려가지 않고 경기도 양평까지 북상한 뒤 원주, 제천을 거친다는 점이다. 제천에서 영월, 정선, 태백으로 가면 동해안까지 나가는 태백선이고 영주를 거쳐 포항까지 내려가면 중앙선이 된다.

○‘선농탕’일까 ‘슈루탕’일까 엇갈리는 주장

▲ 서울 동대문구 선농단(사적 제436호)에서 선농제 재연행사가 열리고 있다. 선농제는 농업신 신농씨(神農氏)와 후직씨(后稷氏)에게 임금이 풍년을 기원하는 제사로, 제를 마친 뒤 고기를 고아 만든 국물에 밥을 말아먹었던 것이 설렁탕의 유래라고 전해진다.
설렁탕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대중음식이다. 몇몇 유명한 설렁탕 음식점은 체인사업을 벌이며 하루에 수만 그릇의 설렁탕을 팔아치운다. 육우나 수입 쇠고기를 한우로 둔갑시켜 팔다가 적발됐다는 뉴스도 나온다.

동대문구는 설렁탕이 제기동에 있는 선농단에서 유래한 음식이라고 전한다. 동대문구는 매년 4월이나 5월 선농단에서 선농대제를 재연한 뒤 쇠고기 뼈와 고기를 고아 설렁탕이라며 시민들에게 나누어준다.

구는 1992년 농림부와 동대문문화원, 선농제향보존위원회 등과 함께 선농단에서 선농문화제를 열고 선농대제를 재연한다. 1909년(순종 3년)까지 이어지다 일제에 의해 중단된 뒤 1979년 제기동 주민들이 올리던 치제를 이어받아 발전시킨 행사다.

구의 설명에 따르면 조선시대 국왕이 여러 중신과 백성들이 참여한 가운데 제를 올린 뒤 선농단 부근의 친경지(親耕地)에서 쟁기로 밭을 가는 시범을 보이는 친경례(親耕禮)를 치렀다고 한다. 친경례를 마친 뒤 소를 잡아 국말이 밥과 술을 내렸는데, 그 국밥은 선농단에서 내린 것이라 하여 ‘선농탕(先農湯)’이라 불렀고 이것이 오늘날 설렁탕의 유래가 됐다는 얘기다.

이러한 설렁탕 이야기는 국민 대부분이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하지만 반론도 만만치 않다. 음식 칼럼니스트 황교익 씨는 자신의 블로그를 통해 선농단에서 설렁탕이 유래했다는 설은 한때 그냥 설이었을 뿐이라고 한다. 하지만 1990년대 선농단 유래설을 들고 나오면서 사실처럼 홍보하게 되고 시간이 지날수록 정설로 여겨지게 됐다는 것이다.

황씨는 고 이성우 교수가 1982년 펴낸 책 <한국식품문화사>를 인용한다. 이 책에는 “영조(1724~1776)대에 간행된 것으로 보이는 몽고어사전인 <몽어유해>(蒙語類解)에 의하면 몽고에서는 맹물에 고기를 넣고 끓인 것을 ‘空湯’(공탕)이라 적고 ‘슈루’라 읽고 있다. 맹물에 소를 넣고 끓인다면 곰탕이나 설렁탕의 무리이다.

따라서 곰탕은 ‘空湯’에서, 설렁탕은 ‘슈루’에서 온 말이라고 봤으면 한다. 오늘날의 곰탕과 설렁탕은 동류이종일 따름이다. 설렁탕을 선농단에 결부시키는 속설은 아무리 생각하여도 후세의 어거지 설인 듯하다”고 지적했다.

설렁탕의 어원이 무엇이든 선농단에서는 삼국시대부터 중국 고대사에 나오는 신농(神農)과 후직(后稷)에게 풍년을 비는 선농제를 매년 올리고 있다. 이는 ‘농업입국’을 내세웠던 조선의 역대 왕들이 직접 행했던 친경 의식을 되살리는 중요한 문화행사로 꼽힌다.

○설렁탕

▲ 설렁탕은 동대문구의 선농단에서 선농대제를 지낸 뒤 소를 잡아 탕을 끓인 뒤 백성에게 나누어 준데서 유래했다는 이야기를 정설처럼 여기고 있으나 몽고에서 기원했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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